「디태치먼트」, 2011
사각예술은 각종 영화, 만화, 음악 등을 리뷰하고 해석하며 덧붙이는 매거진입니다. 업로드 주기는 비정기적이며 현재 네이버 블로그, 인스타그램 운영중에 있습니다 :)
모든 작품은 스포일러를 동반할 수 있으며 들러주신 노고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미국 공교육의 실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길러내며 서로를 붙잡고 함께 무너져가는 사회. 이전의 교육영화들보다 더 가치 있다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토니 케이의 2011년 작품 「디태치먼트」는 꽤나 어둡고 우울한 시선으로 세상의 '무관심'을 고발하는 작품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안고 기간제 교사를 전전하는 주인공의 침울한 눈빛, 꿈과 배움이 자라나는 교실과 도시지만 어딘가 모르게 폐허의 느낌을 주는 영화의 색깔만 봐도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충분히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인 '어셔 가의 몰락'이나 디스토피아 소설 '1987' 등 문학적인 레퍼런스를 많이 차용한 만큼 영화의 대사나 전체적인 흐름 등 하나의 단편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작품은 무관심과 물러남에 대한 이야기를 건넵니다. 무관심한 인간들 뿐인 현대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물러나있는지를 질문하며 조금 더 성숙한 거리감을 갖도록, 건강한 애착을 지향하도록 타이르는 듯합니다.
「디태치먼트」가 주제를 말하기 위해 차용한 소재는 미국의 공교육입니다. 다들 한 번씩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어본 적도 있죠.
미국은 상위 1프로가
상위 99프로를 이끄는 나라다
실제로 미국의 학군지 ・ 비학군지의 극단적인 질 차이는 오래전부터 공공연하게 알려져 왔는데요.
선천적으로 서양인이 지능이 낮아서?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문화적으로 학구열이 낮아서? 그런 이유는 따로 있죠.
미국의 학교 예산 편성 방식은 대한민국과 다릅니다. 대한민국은 주 정부에서 예산을 편성해 하위 기관인 교육부 등으로 가는 방식이라면, 미국은 학교의 재정 상태를 해당 지역에서 거두는 집세, 토지세로 좌우됩니다.
대한민국은 사교육의 영역이 아니라면 어디서 거주한다고 해도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공평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지금은 미국처럼 바뀌어가는 상황이지만요)
미국은 한 마디로 가난한 동네에 살면 공교육 시설이 필연적으로 같이 어려워져 교육의 질이 바닥을 치고, 부유한 동네에 살면 그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공 헨리가 근무하는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아들로 가득한 교실,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는 학교폭력과 갱스터처럼 구는 흑인 아이.
헨리가 작 중 만나게 되는 주요 인물 에리카 역시 길 한복판에서 창부 노릇을 해왔던 것을 보면, 「디태치먼트」는 도시 전체적으로 내려앉은 패배감과 빈곤함을 표현하려 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화로 돌아와서, 문학 교사인 헨리 바스는 가정에서 얻은 상처로 기간제 교사를 전전합니다. 그러다 그는 문제아도 많고 교사들도 의욕을 잃어버린 삭막한 학교에 오게 되는데요.
역시나 교실의 아이들은 헨리를 무시하고 반항하지만 학생을 다루는 데에는 잔뼈가 굵은 헨리의 지도 아래 점점 마음을 열어갑니다.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지도하는 동시에 헨리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면서도 세상과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를 드러냅니다. 가족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과 뒷골목을 쏘다니는 불량아들, 자식에게 관심 없는 부모와 관계를 어려워하는 자기 자신에게도.
이 즈음 헨리는 두 명의 소녀를 마주하게 됩니다. 교실에서 만난 메레디스와 길거리에서 만난 에리카.
메레디스는 가족에게조차 받지 못한 관심과 존중을 헨리에게서 받게 되며 그에게 끌리게 됩니다. 사랑이라기보단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몸을 자연스레 웅크리게 되는, 조금 더 본능적인 애착이라고 할 수 있죠.
길에서 매춘을 하던 에리카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작 열 다섯 아이가 자신의 가능성과 미래를 덮어두고 사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 헨리는 그녀를 한 명의 어른으로써 보살피고, 에리카 역시 헨리의 따뜻함에 마음을 열게 되는데요.
헨리에게 '가까운 사람'들이 생기려는 시점. 그의 트라우마처럼 이 시점에서 모든 게 꼬이기 시작합니다. 학교는 결국 폐교 직전에 다다랐고, 자신에게 다가오던 메레디스와 실랑이를 하다 동료에게 오해를 사기도 하죠.
계속 에리카를 돌볼 수 없었던 헨리는 그녀를 시설에 보내는 등 기간제 교사라는 설정처럼 다시 세상이 떠나라고 등을 떠미는 상황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제목이자 단어 Detachment의 사전적인 의미는 분리, 초연, 무관심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작품 속에는 참으로 무관심한 인간들이 넘쳐나는데요.
앞서 설명했듯 단편 소설을 읽는 듯한 구성은 헨리가 폐허가 된 교실에서 읽는 '어셔 가의 몰락'과 닮아있습니다. 친구인 어셔와 어셔 가문의 몰락을 지켜보는 화자. 헨리는 기간제 교사라는 설정에 걸맞게 영화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조금 떨어져 있는 느낌입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관찰자인 헨리의 시선을 빌려 도시에 천천히 내려앉은 비극을 더 강조해 내는 연출을 사용하죠. 자유자재로 확대대는 카메라나 다큐멘터리스러운 구도가 그 예시입니다.
중반부 헨리는 관찰자로서, 어쩌면 이 모든 문제들로부터 물러나 있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을 학생들에게 전합니다.
너희들에게 끝없이 관념이 제공되고 있다면, 너희들은 어떻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까?
가령 여자들은 따먹어야 하는 존재고 너는 행복해지려면 성형 수술을 해야만 한다는 것들 말이야.
희망적인 교훈보다는 절규와 호소에 가까운, 작품의 최고 명장면이기도 한 이 장면에서 헨리는 무관심에서 벗어나 물러나는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무관심한 태도로 살다 휩쓸리지 말고,
한 발자국 물러나 읽고 생각해 보라.
난 평생 이렇게 살 거야. (다들 그럴 거라고 하니까) 난 평생 불행할 거야 (내가 못생겼다고 하니까 다들).
무언가를 너무 가까이서 보면 결국 시력이 나빠지는 것처럼, 물러남은 나와 무언가와의 거리를 파악하려 애썼음을 방증합니다. 헨리는 자라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도록 가르치고, 보호해야 할 어른으로서 한 발자국 물러나 존중을 표합니다.
별 것 아닌 듯 하지만 헨리에게 어린 아기처럼 애착을 가지게 되는 메레디스와 에리카를 보면 쉽게 주고받게 되는 가치는 아닌 듯하죠.
이토록 헨리는 여러 의미로 무해한 사람입니다. 작품은 그의 입을 빌려 현시대의 비극을 낭송하게 하고 그를 예수처럼 신성한 사람으로 그리는 듯싶지만 헨리는 결코 유일한 성인成仁이 아닙니다.
그 역시 영화가 최종적으로 가리키는 교훈을 엔딩에 이르러 배우기 때문인데요.
작 중 내내 모두와 거리를 두던 헨리를 통해 엔딩에서 전하는 교훈은 '이제 다가가는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헨리는 메레디스의 자살을 눈앞에서 목격하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서로를 상처로부터 지키는 줄 알았던 그의 방식이 처음으로 파국을 만들게 되는 상황이죠. 무언가를 느낀 그는 결국 시설로 찾아가 에리카를 다시 찾아옵니다.
에리카와 다시 재회를 하며 헨리는 어린 시절의 상처 이후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역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며 폐혀가 된 교실 안에서 '어셔 가의 몰락'을 낭송하는 그를 마지막으로 작품은 막을 내립니다.
무관심함은 거리를 알 수 없게 합니다. 배에 구멍이 났다 한들 그것에 관심이 없다면 지금 바닥에 물이 얼마나 찼는지, 조타기는 누가 잡고 있는지 알 리가 없듯 떨어져야 할지, 다가서야 할 지조차 모호하게 만드는데요.
영화 속에서 교훈을 얻고 성장하는 것은 비단 아이들만이 아닙니다. 헨리는 그동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모두에게서 물러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 학생들에게 말했듯 스스로를 지키는 삶은 살 수 있었으나 깊은 관계를 만들지 못해 언제나 고독하고 우울한 일상을 보내던 것처럼 말입니다.
무관심에 익숙해지다 보면 반대로 물러날 줄 모르는 때가 옵니다. 물러날 줄 모르면 다가갈 수 없는 시대가 옵니다. 필자 역시도 잠시 떨어져 깊게 생각하기보다는 귀찮음에 관심을 꺼버리는 상황이 종종 있는데요.
결국 무관심은 쌓이고 쌓여 내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삶과 교육, 관계에서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관념을 받아들이기 쉬워지는 듯합니다.
어쩌면 관심을 끄려고 노력하던 것들은 물러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었나 생각합니다. 가까이 붙어서 손으로 주무르며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내려다 벌어진 일입니다.
마지막으론 '어셔 가의 몰락'의 대목이자 헨리가 읊조리던 대사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전부 따분하고 어둡고 소리 없는 날에, 그 해 가을에.
구름이 천국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을 때
나는 홀로 말을 탄 채 아주 음산한 시골길을 지나고 있었다
땅거미가 마침내 길게 졌을 때 암울한 어셔 저택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게 어땠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 건물을 처음 보았을 때
참을 수 없는 암울한 감각이 내 영혼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 저택의 단순한 풍경을 바라보았고
황량한 담벼락에, 썩은 나무들의 흰 줄기에 영혼의 울적함을 느꼈다
그곳에는 냉담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일종의 침몰이, 심장이 메슥거릴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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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예술 editor Isa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