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 2020
Original Sound Track. 줄여서 OST란 어떤 특정한 영화, 드라마 등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들을 말합니다. 오리지널 작품을 가장 맛깔나게 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OST는 어느덧 한 장르가 되어 널리 사랑받고 있는데요.
때론 '현실이 영화 같다'는 말을 하는 우리들. 실제 인물의 전기 영화가 심심찮게 나오는 것처럼 모두의 삶에는 저마다의 굴곡과 시퀀스, 조력자와 대적자가 있습니다.
한국의 1세대 힙합 아티스트, 딥플로우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린 다 각자의 영화 속에 살고 있고,
이 앨범은 내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다
관계를 빙자한 계약, 계약을 빙자한 좌절. 이미 만들어진 영화 속 관객이 어쩔 수 없는 주인공의 선택. 또 주인공이기에 비난할 수 없는 선택들이 즐비한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의 삶을 담은 「FOUNDER」입니다.
특히 '언더그라운드의 배교자'라며 여론이 극악으로 치닫았던 그는 이 앨범 한 장으로, '설립자'라는 뜻의 본 앨범으로 리스너들의 실망감에 대한 답변과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 또 음악으로서의 최상의 청취감을 증명해 냅니다.
힙합을 하겠다는 꿈으로 뛰어든 젊은 혈기부터 업계 동료와의 마찰, 감각을 괴사시키던 세간의 비난과 업계 사장님이 되기까지 그의 시퀀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의 전작이자 또 다른 명반인 「양화」 발매 5년 후, 기존의 힙합 음악작법과 달리 풀 라이브 밴드 사운드와 영화 음악이라는 컨셉으로 돌아온 딥플로우의 「FOUNDER」입니다.
라임이 귀에 흘러 들어오는 참여진들의 노련한 랩과 깊은 가사, 그리고 풍부한 사운드의 밴드 셋업을 비트로 구성하며 마치 고전 누아르 영화를 귀로 듣는 듯한 느낌이라는 호평이 많은데요.
또한 '설립자'라는 뜻의 제목답게 본 앨범은 자전적이고 솔직한 이야기, 실제 딥플로우와 가족이나 다름없는 동료들의 피처링으로 청자로 하여금 그의 인생의 한 토막에 깊게 몰입할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내 인생의 한 컷이었던 양화
자신의 모순된 행보와 과거의 실수에 대한 이야기, 또 담담하게 풀어내는 '돈벌이' 이야기와 인생이란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각각 드러내는 각자의 생각들.
힙합에 있어서 진짜란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빈곤함과 예술의 관계, 예술가라는 존재에 대해 빡빡한 한국의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등 경험이 많은 베테랑 다운 주제와 철학들이 앨범 곳곳에 숨어 있는 명작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현실. 9번 트랙 'Dead Stock' 의 가사입니다.
남들처럼 살기 싫어 힙합을 했는데
여기서 다르다는 건 빈곤이더라
예술과 돈벌이란 모순되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서로를 따라다니는 존재입니다. 마초적이고 마니아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 힙합씬에서 그들은 '가짜'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빈곤해야만 했던 걸까요?
본래 딥플로우는 언더그라운드 힙합씬에 남길 자처하며 대중성을 확보해 잘 나가던 다른 래퍼들에게 '돈을 벌고 영혼을 팔았다'고 손가락질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올드하다는 이유로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진 수많은 동료들을 뒤로하고도 한국 힙합씬의 큰 줄기가 된 회사 VMC를 세운 뒤 '뚝심 있다', '소신 있다'며 치켜세워진 그의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딥플로우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고 질타하던 '예능 래퍼'가 된 모습을 보여주며 힙합 팬들로 하여금 그 괴리로 인해 지독한 업보를 돌려받게 됩니다.
더 이상 그의 소속을 언더그라운드라고 표현하긴 어렵게 되었지만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후배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그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딥플로우라는 아티스트의 신보에 기대하지 않았으며 그가 쌓아온 커리어에 대한 실망을 내비쳤는데요.
내 현실과 꿈 사이를 갈라놨던 한강
보릿고개 같던 몇 해 밥 숟가락은 열 개
집과 작업실세 또 아버지는 입원실에 다 얼마지?
높던 철옹성들이 삐걱대고 재건축되는 걸 지켜봤네
(피처링 최항석의 보컬이 정말 충격적이게 좋다)
미팅은 대출심사 같고 매출이란 없던 우리 음악의
신용등급은 Warning(경고) TV용 가수가 없다며 곤란해들 하네
우리 열 명에게 책정된 건 five Hunnit
친구가 동료가 되고 크루원이 되며 신인에겐 달콤한 주목을 받았던 초창기. 그럼에도 너무나도 높았던 현실의 벽과 첫 계약으로 받은 돈은 'TV용 가수가 없다'며 단돈 500만 원을 받습니다.
배 굶어도 신념만은 지키자며 동료들과 하려던 사업은 신념을 무너뜨려야만 가능한 상황으로 변하게 되고.
복채 안 써도 미래를 봤지 늘 노마진이었던(남는 게 없던) Mr. low budget
그의 시선에서 양산형 음악이었던 대중가요를 하지 않고, TV 출연을 거부하며 신념을 지켰지만 남는 것은 빈곤함. 빈곤을 자처하고 신념을 세워도 남는 것은 동료들의 불안감과 가족의 병원비에 허덕이는 무력감, 그리고 사회에선 알아주지 않는 무능력함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실력 하나만큼은 베테랑이었기에 4번 트랙 '품질보증'은 과거 '악당출현'의 참여 멤버를 그대로 가져오며 여전한 폼을 보여줍니다.
또한 5번 트랙 '대중문화예술기획업'은 본격적으로 VMC 크루를 회사로 만들려던 일련의 과정을 코미디 영화처럼 풀어냄으로써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예술을 절차로 증명하라는 모순적인 시스템을 풍자하죠.
Crew에서 Company, 두목에서 사장님
감투는 달라져도 호칭까지는 사양임
음반사는 국가에서 정한 면허를 따야 되고
그 자격증 이름 '대중예술문화기획업'
동종업계 직원 또는 매니저로 최소 4년간의 근무기록
'전 매니저는 아녀도 이걸 한 게 몇 년, 자격은 충분하다고요'
결국 내 커리어는 무쓸모지
그럼에도 결국 회사를 설립하고 신보를 열심히 이어오던 딥플로우와 VMC 동료들은 계약금 500만 원 시절에서 더 큰 거래를(Bid Deal), 더 큰 수입과 더 넓은 환경을 손에 얻게 됩니다.
그냥 된 거 하나 없이, Yeah
그냥 내가 따낸 거지 다
이젠 어디 가도 Big Deal
어렵던 거 다 쉽지
그렇게 잘 풀리는 줄 알았으나 7번 트랙을 기점으로 딥플로우와 돈과의 지독한 아이러니는 시작되는데요.
10년 뺑이쳐도 they don't know
방송 나왔더니 '걔가 너?'
전당포 맡겨 내 트로피
내 바뀐 좌표는 Profit
:: 10년간 업계에서 굵직한 커리어를 쌓아왔으나 방송에 나온 뒤에야 알아보는 사람들 / 자신의 업적이자 신념을 돈으로 바꾸고(전당포) 이젠 이익만을 바라보게 된 그
좀 징그럽지 너와 계산기 들고 말하다니
우린 분명 같은 꿈을 꾸고 서있었지 나란히
하지만 이미 동생들 눈에 이제 난 상구 형(본명) 이 아닌 사장님
내가 썼던 수천 개 Verse 다 배 아파 출산해
But 다 다른 정산 숫자는 내게 주사위
누가 더 나은 자식 놈인가를 나누다가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처음과는 다른 사람'
:: 한때 영혼을 담았던 가사들조차 돈 벌기 위해 써내는 상황이 되어버림 / 그중에서도 어떤 게 더 잘 벌릴까 고민하게 되는 '나'는 이미 예전과 다른 사람이라고 시인하며 자신의 변절을 이야기한다
캘린더에 적힌 너희 내일 스케줄은 알아도
요즘에 네가 뭘 듣고 또 꽂혔는지 I don't know
야, 네 눈엔 어때 보여 내 머리 위 감투
술이나 사는 형일지, 무관심하고 바쁜
죄책감의 새벽귀가 눈감고 또 뜨자마자 신발 신고 챙겨 지갑
그럼 엄마는 하루종일 누구와도 대화를 못해
:: 돈을 벌어대며 번듯한 사업가가 되었지만 주변인과는 멀어지는 아이러니를 기업이 창출하는 가치마다 부과되는 '부가가치세'로 비유
만족감이라는 건 나사 풀린 리클라이너(의자)
이 버블 시대 내 무대 시급은 몇 백만 원
거품 샤워는 막바지고 꼭지를 잠가
:: 나이가 들고 상황은 더 좋아졌음에도 언제 무너질지 몰라 더욱 불안해지는 미래
인터뷰에서 '이 앨범이 변명처럼 들리는 것을 우려한다'고 밝혔듯 그의 사정은 그저 담담하게 풀어지며 그냥 그랬었다는 듯 청자에게 전달됩니다.
과거 자신이 상업 래퍼라며 상처 주었던 업계 동료, 변절한 후 무너진 그의 신념을 디스 하는 다른 래퍼들. 빈곤할 때 느꼈던 따뜻함과 풍족할 때 느끼는 빈자리 등 단순히 그의 가사와 사운드만으로도 설득력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데요.
궁핍할 때 걸작이 나온다는 예술계의 격언(?)처럼 명반 Founder의 탄생 역시 돈으로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존재해 왔었음을 반증하는 듯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엔딩은 가깝고도 멉니다. 중요한 건 지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화는 엔딩을 맞이하기 전 까진 관객을 흥분하게 하고 긴장감을 유지하며 이어져야 하듯이 12번 트랙 'Pretext Interlude'에선 실제 무대에서 했던 멘트를 주인공의 독백처럼 Skit(분위기 환기, 흐름 유지를 돕는 앨범 내 장치)으로 배치합니다.
딥플로우는 앨범이 끝나도 자신의 한 시퀀스가 지나갔을 뿐이라며 불안한 미래임에도 자신의 청사진을 더 꼼꼼히 점검한 채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오픈카를 타고 업무용 휴대폰을 잠시 꺼둔 채 고속도로를 달리는 저녁노을이 생각나는 마지막 트랙입니다.
Night to light
터널의 끝에 다 와가
돌아보지 마 언제나 다음 네 청사진을 봐
이젠 안심하고 인수인계 다음 세대와 지분 나눌 수 있게
내 청사진의 전제는 꼭 내 가족과 Shootin'
각자 다 달랐던 약속의 장소에 만약 내가 못 닿아도
여기 함께인 걸로 됐어 나는
날 대신하는 Persona들
성공한 뒤 벤츠, 모두가 우러러보는 벤치
창업의 리스크에 대한 우스갯소리로 '성공하면 벤츠, 실패하면 벤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FOUNDER」의 화자 딥플로우도 스타트업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삶을 꾸리게 되었는데요.
그 끝이 창대하지는 못했고 그의 회사 VMC도 역사의 뒤안길로 저물었지만, 필드가 아닌 벤치에 앉아있는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위치일 것입니다.
「FOUNDER」는 어쩌면 예술가의 고통이라는 흔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답을 내리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예술가는 배고플 때 성장한다는 말과 다르게 사실 사람들이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건 배 나온 사업가라서요.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형'이 되어가는 그는 어떤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요? 물론 「FOUNDER」를 들었더라도 그가 이미 뱉어버린 말들과 내세운 모순들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흔하고, 또 서글퍼지는 '돈'에 무릎 꿇은 예술가의 모습처럼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그가 뱉은 가사처럼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은 결국 인생이란 영화의 한 컷입니다. 본디 영화에는 반전도 있고, 히어로의 몰락도 있으며 여운을 남기는 새드 엔딩도 있기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