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때문에」, 1987
한국의 80년대 음악은 가요의 르네상스기라고도 불립니다. 현시점 대중음악에서 소비되는 장르의 발판이 대부분 80년대에 탄생했고, 이 황금기에 태어난 수많은 명가수들은 오늘날까지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요.
국가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치면서도 가장 실험적이고 풍성한 작품들이 전시된 시대지만, 당시 대중가요는 향락적이고 오락성이 짙다는 인식이 여전히 강했습니다.
심지어 고전 클래식을 대중음악으로 리믹스하는 게 트렌드인 오늘날과 달리 클래식 전공자들은 대중가요를 작곡하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퇴학까지 감수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한국의 싱어송라이터, 故 유재하 역시 80년대를 풍미한 명가수이자 유작 「사랑하기 때문에」로 발라드의 패러다임을 바꾼 가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음악은 시류를 바꿔버린 명작으로 평가받는데요.
그러나 인간 유재하의 삶은 길지 못했고, 또 제때 빛나지 못했습니다.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항상 수수한 모습으로 노래하던 그는 방송국 PD에게 "화려하지 않고 너무 밋밋하다"며 거절당하기 십상이었습니다. 지인들을 몰래 섭외해 앨범 작업을 진행할 때면 그의 뒷모습을 두고 부모님은 못마땅해하셨다고 하죠.
그럼에도 유재하는 자신이 부비고 사는, 자신의 하루에 존재하는 수많은 대중에게 닿을 음악을 연구했습니다. 커트 코베인의 생전 목표가 '궁극의 팝'을 만드는 일이었던 것처럼요. 그렇게 그의 1집 「사랑하기 때문에」에는 한 청년의 고뇌와 애절한 사랑, 미약하지만 꺼지지 않은 희망과 덮쳐오는 슬픔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는 앨범을 발매하고도 반응이 없거나 혹평을 당할까 한동안은 불안감에 질려 지냈다고 하죠. 마침내 앨범은 조금씩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기 시작했지만 그는 모든 걸 뒤로 하고 사고로 인해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25세라는 꽃다운 나이에요. 이후 먼저 떠난 아들에게 보낸 어머니의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며 그저 음악을 사랑할 뿐이었던 청년이자 자식이었던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짙어지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지금도 방에 누워있으면 네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루종일 치는 피아노 소리를 시끄럽다고 야단도 많이 쳤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그립구나.
「사랑하기 때문에」에는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가사로 드러납니다. 오래도록 몸 담아 온 클래식의 선율과 밤하늘의 별, 사랑하는 연인, 또 보잘것없는 자기 자신.
후일담에 따르면 유재하가 첫눈에 반해 사랑한 사람은 대학 시절 재회한 초등학교 동창이자 본 앨범에 플루트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했다는데요. 연인 관계가 된 두 사람이 사실은 약혼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었다는 게 밝혀지며 그 애절함이 더 심화되는 느낌입니다.
햇님이 방실 달님이 빙긋
우리들의 사랑을 지켜봐 주는 것 같아요
가슴으로 느껴보세요
난 얼마만큼 그대 안에 있는지
「우리들의 사랑」
밤하늘 보면서
느껴보는 그대의 숨결
두둥실 떠가는 쪽배를 타고
그대 호수에 머물고 싶어라
「그대 내 품에」
앨범 전반적으로 묻어 나오는 우울함과 서정적인 감성 역시 사랑의 일부라는 듯 그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깊이 사색을 표하곤 합니다. 언제나 무언가에 몰두하는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미성숙하고 뒤쳐지며 안쓰럽잖아요.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쳇바퀴 돌듯
끝이 없는 방황에
오늘도 매달려 가네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돼 주오
「가리워진 길」
그럼에도 그가 품었으며 남들도 품어주길 원하는, 다시 재회한 첫사랑이나 진정한 꿈을 찾았을 때처럼 거창하지 않은 작은 희망은 앨범의 후반부를 장식합니다.
다시 못 올 지난날을
난 꾸밈없이 영원히 간직하리
잊지 못할 추억 속에
난 우리들의 미래를 비춰보리
「지난날」
나를 바라볼 때 눈물 짓나요
마주친 두 눈이 눈물겹나요
그럼 아무 말도 필요없이
서로를 믿어요
「우울한 편지」
마지막 트랙 '사랑하기 때문에'는 앞의 모든 노랫말들의 구실이 되어줍니다. 앨범 제작의 가장 큰 이유였던 연인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진심 어린 고백을 합니다.
커다란 그대를 향해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한 청년의 마음에 있던 빛과 그림자는
피아노 건반이 되어
음악사라는 악보에 기록되었다
「사랑하기 때문에」의 특장점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세련된 음악적 시도입니다. 당시 대중음악은 채널을 마구 돌리다가 멈추게 되는, 앨범을 뒤지다 귀에 걸리는 '후킹'을 중요시 생각했기에 소위 뽕끼라고 하는 관습이 녹아있었는데요.
그러나 유재하의 음악은 오로지 진정성과 음악적 시도로서 이를 타개했습니다. 일전에 선우정아의 「Serenade」를 두고 "아티스트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 대중이 듣고 싶었던 말로 이어지는 것은 세상과 자신의 감정에 대한 솔직한 고찰의 결과다"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유재하는 오히려 대중과 거리가 먼 클래식, 재즈풍의 프로덕션과 오늘날의 '시티팝' 트렌드를 예견한 팝 사운드를 통해 자신의 솔직 담백한 감성을 노래하며 위로와 공감을 얻어냈습니다.
아이돌 음악의 과포화 시대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들고 나타난 뉴진스의 성공이 그 돌파구를 다시금 증명한 것처럼요.
그저 한 명의 대학생이 오늘날 2~3천만 원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작곡, 작사, 노래 나아가서는 대중과 평단의 찬사까지 거머쥔 것을 보면 그의 비범함을 체감할 수 있죠.
'클래식 전공자가 대중음악을 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는 시류는 오히려 클래식의 고급스러움과 세련됨이 범대중적인 감성을 건드리며 진정성은 더 깊게, 퀄리티는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클래식은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1집이 그의 유작이 되었지만,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 앞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멈춥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목소리로 리메이크되고 연주되며 새로운 관객들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들어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멜로디는 오늘날에도 사랑에 허덕이는 이들을 멈춰세워 위로하고, 또 유재하의 입체적이고 감성적인 내면처럼 관객들은 스스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故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였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