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해지자
세상은 둘로 나눠지는 게 아니다
어릴 적에 미국의 서부영화가 유행이었다.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OK 목장의 결투>, <장고> 등이 그 당시 유명했던 영화들이다. 거기선 항상 좋은 놈과 나쁜 놈이 확실히 구분되었다. 중간에 영화를 보더라도 처음부터 영화를 본 가족에게 누가 나쁜 놈인가를 묻고 나면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가 결정되고 내용을 이해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주인공은 좋은 놈이었고 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나쁜 놈을 죽이기를 간절히 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나이가 들다 보니 좋은 놈과 나쁜 놈을 나누는 게 서부영화에서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항상 좋거나 항상 나쁜 사람은 없다. 양 끝 사이에 무수히 많은 유형이 있다. 밖에서는 착하게 굴다가도 집안에서는 날 서 있던 사춘기를 우리는 겪었다. 잔인하게 고문하던 사람이 자식의 전화를 받고 다정하게 말하는 것처럼, 치를 떨 정도로 끔찍한 짓을 한다 해도 그 사람조차 여린 부분이 있다.
양극단으로 나누기가 ‘칼로 물 베기’ 같아서 그렇게 나눌 수 없을뿐더러 편 갈라서 나누려는 사람의 의도가 더 악의적일 수 있다. 그렇게 세상은 섞여 있다.
편견이 오류를 만든다
여전히 내 편이 아니면 모두 네 편(싸워야 할 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경쟁을 오히려 조장하는 사회체계도 있다. 둘로만 나누는 세계에서는 사고가 경직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분법적인 틀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자신이 이해하는 범주 밖은 틀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또한 상당하다. ‘다르다’가 ‘틀렸다’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인종주의, 선민의식, 혐오 같은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다른 의견, 다른 입장, 다른 성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른 언어, 다른 인종, 다른 문화도 몇백 개다. 각기 나름의 역사가 있고 이유가 있다. 이렇듯 세상은 다양하다. 거기에서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은 아주 조금일 것이다. 그런데 그 조금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잘못됐다고 한다면 어느 쪽의 오류가 더 커 보이는가? 다르다는 것에 편견을 줄여야 그 나머지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우리는 ‘단일민족’을 자랑삼아 강조했던 적이 있다. 단절된 공간에 사는 것도 아니고 오랜 역사에서 단일일 수도 없지만 왜 이게 자랑할 만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여기에도 다른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다고 본다.
지금은 다문화 가정이 가족의 한 형태가 되었고 이런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도 다양하다. 다른 문화권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단일민족이라는 폐쇄성에 갇혀 있을 수 없다. 경직된 사고는 다양한 세상에서는 벗어나야 할 감옥이다.
다양해야 건강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우리나라는 가장 빠른 변화를 겪었다. 세대차라면 보통 30년의 간격을 가리켰는데 요즘은 훨씬 짧아진 것 같다. 새로운 전자기기에 따른 낯선 용어들이 있고, 화장품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새 외국어가 잔뜩이다. 줄여 말하는 게 유행이어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많다. 우리나라 사람끼리도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해 못 하는 말을 쓴다고 젊은이들을, 자식들이나 손주들을 틀렸다고 배척하겠는가.
다름은 이렇게 늘 일어나는 일이다. 그걸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를 내가 결정할 수 있지만 틀렸다고 혐오할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게 똑같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자연은 다양성이 살아있어야 건강하다. 멸종되는 생물이 많을수록 지구가 위험해진다. 같이 어울려 살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동물이 살 곳을 빼앗으며 코로나 같은 치명적인 병에 걸리게 되었다. 사회도 역시 획일화되면 위험하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뇌에 자극을 주자
나이 들면 새로울 것이 별로 없어서 삶이 주는 자극이 적다. 그러면서 사고가 더 굳어지고 뇌도 둔해진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그래서 중요하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 배우는 단계에서 잘 안되면 스트레스받아서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그 단계를 넘으면 익숙해지고 별것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으니 그 스트레스조차 즐겨보자. 새로 알아가는 데 재미를 붙이자. 무궁무진한 세상이 있어서 그 재미는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서 더 유연해질 수 있다.
무술을 가르치는 한 체육관 유리창에 ‘유연성이 젊음의 척도’라고 쓰여 있었다. 몸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생각이 유연하면 그만큼 활력이 있고 건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