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eul illang Apr 04. 2024

위대한 개츠비 마지막 문장으로 사랑 글쓰기

(3) 위대한 개츠비와 - 지금 내게 사랑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사랑이 꽃같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사랑은 

꽃이어야만 했을 어떤 것이었겠지.



내게 사랑은 여러 모양이었다. 그 중 마음에 들게 예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남들은 하트 모양, 곰돌이, 별, 달, 그 어떤 특별한 걸 잘도 만들어내던데. 반죽부터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소망을 담아 모양틀에 예쁘게 찍어낸 것을 오븐에 적절한 온도로 돌렸는데, 분명 딱 맞는 시간에 꺼내기도 했는데. 반짝이는 별사탕 맛이 통통 입안을 쏘는 남들 것과 달리 내 것은 맛이 너무 없었다. 너무 오래 뜸들인 탓인지, 성급히 꺼내버린 것인지, 혹은 반죽을 잘못 쑨 것인지.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두 동강내 버렸던 적도 있고- 좀 먹어보기도 했다가 끝 맛이 다 안익은 터라 뒤늦게 물로 입을 헹군 적도 부지기수. 

그래서 흔한 사랑 노래말이 든 유행가를 싫어했다. 남들이 대체로 공감하는, 따라 부르기 쉬운 가사말과 멜로디. 그걸 난 제대로 겪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단 말야. 고까운 마음에서 튀어나온 반항심을 나는 그저 '홍대병 말기' 정도로 치부했다. 세상이 다 너로 가득하다던지/ 눈 앞에 아른거려 미치겠다던지 같은 유치한 말장난을 진짜로 믿는 거야? 세상 사람들이 나만 두고 몰래카메라를 하는 건 아닐까. 특히나 2030에게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유죄라고 판결하는 대한민국에서, 사실은 나처럼 제대로 사랑이 뭔지 느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모난 돌이 되기 싫어 이해하는 척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건 아닐까. 다들 진지하게 감상에 젖어있을 때- 나는 말했다.

[아, 전 진짜 사랑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아, 그렇다고 사랑에 상처를 받은 적이 없냐면 그건 또 아니다. 사랑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과도했던 20대의 나는 참으로 모든 시도에 대담하고 결과값에는 무지했다. 그래서 멍청하게 모든 감정 앞에 '사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뛰어들었다. '진정한 사랑'을 찾겠다는 해맑은 여자 앞에 기다리는 건- 몇 건의 얕은 수작질. 그리고 기대에 못 미치는 쓸데없을 경험. 친구들과 쌓는 우정보다 더 좋고 멋지고 황홀한 세상이 연애를 하면 열릴 줄 알았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고백을 건네면- 그럼 저 연애라는 나라에 입장을 해 볼까? 했다. 초대장이 쥐어졌는데-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 건 기회를 날려버리는 거니까. 로또 당첨이 되려면 로또를 구입해서 긁어봐야지. 시도도 않고 '에라, 이것도 꽝이겠지.'하고 무조건 포기할 수는 없었단 말이다. 그런 사람들과의 사랑을 찾는 시도 속에서 내가 발견한 건 하나다. [체념]. 

내가 바라는 사랑을 나는 뭔지도 모르면서 상대에게 구걸했고, 상대는 형태도 없는 무지개를 잡겠다고 허공을 뛰어다녔다. 

-사실 사랑한다는 말 앞에 뭔가 걸리는데, 이건 무슨 마음일까.
-모두 주저하면서도 일단 상대가 바라니까 뱉고 보는 게 사랑일까.


나는 나의 사랑에 상처를 받은 셈이다. 내가 바라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위해 채를 여러 개 들고 몇십 년을 들판으로, 산으로, 물가로 쏘다녔지만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서. 그럼에도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자신의 눈동자에 화가 나서. 이만 집으로 돌아갈래- 사랑 없이도 사람은 잘 살 수 있어. 하고 청춘의 뜨거움을 수납했다.

가족의 사랑, 세상에의 사랑, 스스로의 사랑. 내가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알았다. 밖에서 찾아도 아무리 채워지지 않았던 채집통에 무언가 쌓이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나돌아다니던 모르는 사람들과의 1회성 만남을 줄이고 마음이 편한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보았다. 가족이 버거웠던 나날들에 안녕을 고하고 나 하나로 스며들어보았다.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언젠가의 눈을 바꿔보았다. 

어렴풋이 알게 됐다. 사랑이란 꼭 사냥꾼처럼 손에 쥔 채 가지는 것이 아님을. 마음으로 다가오는 어떤 빛이었다, 그건. 아무리 해도 붙잡을 수 없던 게, 나 하나로 반짝이니 눈 앞에 다가와 나를 마중해주었다. 애니메이션의 그 대단한 클리셰적인 대사처럼. [난 늘 네 안에 있었어.] 같은 재질.



사랑은 찾으러 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그저 하루를, 삶을 산책처럼 거닐다 보면 나를 이미 쏘이고 있는 오후 3시의 햇살같은 것. 눈이 부셔 왼 손을 들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 '아, 이 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구나.'하고. 그리고 그 따스함을 조금 더울지언정 그 자리에 풀썩 앉아 저녁이 될 때까지 만끽하는 것. 저녁이 되면 이 빛이 사라질 거라 미리 걱정하지 않는 것. 과거의 사랑은 과거에 머무르게 한다. 오늘의 사랑은 오늘 이 시간에 맞이하자. 다가올 사랑 앞에 과거가 떠오를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용기를 잃지 말자. 가득 담을 언젠가의 나를 위해.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감상 소설]왜 글쓰기 클럽에 왔냐고 물으신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