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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이수 Jan 30. 2024

다소 기이한 사랑고백

이수기(1)



이수'기(記)' :: 이수의 일기






-혹 모양이 예쁘지가 않네요. 혹시 조직검사 받아보셨나요? 

몇 년째 이어왔는지도 가물가물한 추적 검사였건만 부정적인 소견을 들은 건 지난 해가 처음이었다. 재작년까지도 그저 크기가 커졌다는 소식 외에는 별 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만큼 당황스러운 터였다. 얼떨결에 대학병원에 가져갈 진료의뢰서를 받고, 진료일을 기다렸다. 


갑상선에 혹이 생긴 걸 알게 됐던 건 8년 전 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오른쪽 귀 밑에 엄지손톱만 한 염증이 생겼는데 당시에도 이비인후과에서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겁을 줬었다. 눈 다래끼와 여드름을 달고 사는 체질이었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이는 염증도, 심한 통증으로 괴로운 것도 처음이었던 만큼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다 대학원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이렇게나 해롭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당시 만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남자친구와 함께 진료를 받으러 갔었다. 스물여섯 살 어엿한 성인이었지만 난생처음 겪는 고통은 나이와 별개로 무서웠고, 나는 다른 이들보다도 대형병원을 극도로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고작 한 살 많은 남자친구는 겁 많은 여자친구를 위해 어른인 척 함께 병원에 가줬다. 제발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해주세요!라는 마음으로 선생님 앞에 앉았을 때, 선생님은 귀 밑 염증이 문제가 아니라 갑상선에 혹 있는 거 알고 있냐고,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작고 모양도 예뻐서 조직검사까지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덧붙이셨다. 염증이 이렇게 아픈데 이건 문제가 아니라니. 보이지 않는 목 속에 혹이 있다니. 근데 모양이 예뻐? 일단 좋은 뜻 같은데 갑상선도, 예쁜 혹도 내 삶에 처음 입력되는 단어들이었다. 대한민국 여성들 대다수가 목에 혹을 달고 살고 있고, 갑상선 관련 질환은 여성들이 겪는 흔한 질환 중 하나라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나 역시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살면서 무언가에 크게 욕심을 부린 적은 없었다. 현재 주어진 것들을 유지하는 것도 언제나 버거운 삶이었으니까. 내가 버는 아르바이트비로 삶을 겨우 꾸려나가는 내 이십 대에서 매달 필수로 나가야 했던 고정비용에 대한 걱정만 안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만약 욕심이었다면 세상이 너무 가혹한 거 아닐까. 로또가 당첨되면 무엇부터 할지 생각했을 때도, 우선 학자금 남은 잔액을 털고 싶다고 이야기하던 나였는데. 혹부리영감처럼 어처구니없는 욕심을 부린 적도,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한 적도 없는데 난 데 없이 혹이 생기다니. 정말 나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혹은 매해 내 목 속에서 조금씩 크기를 키워갔다. 잘해 준 것도 없는데 뭐가 좋다고 그렇게 커져가니.. 그래도 재작년까지는 별 이상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의례적이어도 검사를 받고 나오면 마음이 편안했다. 수차례의 검사를 받는 세월 속에서 늦은 나이에 첫 취업을 했고 삶이 드디어 정상궤도로 올라갈 수 있을까 기대를 하던 참에, 기다렸다는 듯 조직검사를 받아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화가 났다. 내 몸 상태에 대한 걱정보다는 진단비, 실비가 어디까지 청구가 될지, 만약 수술을 받아야 한다면 수술비는 얼마나 나올 것인지.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따위의 걱정들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타입의 인간이 바로 나였다.

 

조직검사 제안을 받았던 연말의 그날, 병원을 나오며 바로 조직검사 진료일에 맞춰 오후반차를 신청했다. 정신없이 연초가 지나갔다. 한 달은 금방 지났고, 진료 당일 오전 업무를 마치고 병원으로 향했다. 12년 전 이 때도 매일같이 할아버지 경과를 보러 병원에 다녔었다. 교통사고로 순식간에 생을 잃어버렸던 할아버지를 보낸 후로는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어떻게 죽게 될지 온갖 경우의 수를 강박증처럼 생각하고 사는 인간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이번에 막상 병원에 가던 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갑상선 암은 암도 아니라는 후려치기를 많이 당해서일까. 혹 모양까지 예뻐야 되나 기분이 상해서였을까. 그저 생각보다 날이 덜 추웠고, 곧 할아버지 기일이구나라는 생각이 전부였다. 8년 전 아무것도 모르고 여자친구가 걱정돼 쫄래쫄래 병원에 쫓아갔던 남자친구는 이제 남편이 돼서 와이프가 암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검사받으러 다시 또 병원에 함께 했다. 갑상선, 유방과에는 분홍색 가운을 입은 여성들이 대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나 역시 같은 가운을 입고 한참을 기다렸다. 아픈 사람들, 또는 아플 수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대형병원의 압도감은 그런 데서 비롯되는 것 같았다. 내가 살던 현실과 똑 떨어져 차마 알 수 없는 온갖 삶들이 응집돼 있는 것 같은 그런 위압감. 누군가의 희망과 슬픔과 절망이 온 데 뒤섞여 가늠할 수 없는 감정들이 병원 곳곳에서 파도치는 것만 같았다. 아마 12년 전 우리 가족의 절망도 그렇게 병원 곳곳을 흐르고 있었겠지. 그래서 나는 늘 병원에 오면 겸허해진다.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검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아팠다. 마취 없이 침인지 바늘인지 모를 것이 목을 뚫고 들어올 때 굉장히 오랜만에 느끼는 종류의 고통에 깜짝 놀랐다. 아 맞다, 이런 고통도 있었지. 아주 어렸던 열한 살, 잠겨있던 놀이터 담장을 넘다가 울타리에 발목이 찢겼을 때 이후였나, 아냐 스물두 살 때 했던 쌍꺼풀 수술 이후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오래 잊고 있었던 신체적 접촉을 통한 고통. 매번 심적으로 죽겠다고 느끼던 내가 온몸으로 생생히 느껴지는 고통에 오히려 살아있다고 느끼다니. 아파서 이렇게 놀라다니. 사람이 참 웃기구나. 담담하게 ,이제 다 끝나갑니다,라고 말하던 목소리와 달리 내 목을 바늘로 계속 헤집던 의사 선생님을 노려보다 보니 검사가 끝났다. 바늘이 꽂혔던 목 한가운데에 대일밴드를 붙이고 얼얼한 그 부위를 손으로 꾸욱 누르며, 한참 기다린 남편 옆에 기대앉았다. 작은 바늘로 목을 두 번 찔렸을 뿐인데 온몸의 기력이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오후 반차임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업무 관련 체크할 일이 없는지 핸드폰을 둘러보는데,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분께서 검사가 어땠는지 물어봐주셨다.

-아니 갑상선은 살짝 따끔하다고 들었는데 바늘로 휘젓지 않았어요?

-저는 두 번이나 했는데 두 번 다 휘저으시더라고요. 너무 아팠어요!

-잘 누르고 계세요, 피가 나올 수도 있다더라고요.

같이 목을 뚫린 동지로서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갑상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도 잠시였고, 밀려있는 대기자들을 위해 자리를 내드리고자 내가 먼저 짐을 챙겨 일어나던 찰나에 그분께서 '행복하세요.'라고 말씀 주셨다. 생전 모르는 사람에게 병원에서 행복하세요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올랐다.

-네, 선생님도 행복하세요. 우리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와도 행복하기로 해요. 


병원에 나와서는 목에 대일밴드를 붙인 채 근처 식당에서 남편과 밥을 먹었다. 회사 근처이나 점심시간을 할애해 나오기에는 제법 거리가 있던 냉면집이었다.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을 들이켜고 싶었는데 혹여나 뚫린 목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날 보며 남편은 갈비찜을 시켰다. 든든하게 먹고 튼튼하라며. 병원에서도 큰 생각이 없었지만, 나를 위해 갈빗살을 발라주는 남편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이 속상할 일이 없도록 건강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 보는 나의 행복을 기원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누구보다도 나의 행복을 가장 바라고 있을 이 사람을 위해. 우리가 아직 못 해본 것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고, 이토록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나 때문에 속상하다면 나 또한 굉장히 슬플 테니까. 검사 결과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예쁜 꽃과 맛있는 케이크를 사 오고, 출처 미상의 웃긴 춤도 춰주고, 나 몰래 눈치 보며 깜짝 카드도 써주는 당신을 위해서라도 건강해야겠다. 행복해야겠다. 별 것 아니고 나약한 삶일지라도 함께 할 시간들을 위해 나를 소중하게 지켜나가야겠다고 말이다. 내 혹아 예쁘지 않더라도 부디 아무 일 없어주길 부탁할게.


다들 헷갈릴 수 있지만 이것은 결국에 길고 길게 풀어쓴 사랑고백이다.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2su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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