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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반하별 Apr 22. 2024

소설 <503호 열차>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이야기

5년 전,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바이칼호수가 있는 러시아 이르쿠츠크로 국경을 넘어가던 중이었다. 몽골에서 게르 체험을 하고 몸이 노곤한 상태였던 당시 어린 두 딸과 남편이 함께 하고 있었다.

자정쯤 잘 달리던 열차가 멈춰 서더니 러시아 국경수비대가 네 팀에 나눠 기차 내부를 정밀 수색하기 시작한다. 몽골에서 러시아로 밀수하는 물품을 들여오지는 않는지,  불법체류자는 없는지 검색하는 과정이었는데, 열 감시 카메라를 들이미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확실하게 비자를 소지한 힘 있는 나라 여권소지자들이었기에 안전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해당되는 사람이 있으면 무지막지한 완력을 쓸 준비가 되어있는 모습이었다. 늦은 4월이었지만, 아직도 눈밭인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경험한 러시아의 첫인상은 서늘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거덕 우거덕 파도친다. 에헤야 뿌려라, 씨를 활활 뿌려라. 땅의 젖을 다 먹고 와삭와삭 자라나네…….”


소설 <<503호 열차>>에 등장하는 한 소녀가 부르던 노래자락이다. 1930년대 구소련이 행한 연해주 조선인  강제 이주 정책을 소재로 동화 이야기로, '503호'는 그 한 많은 고려인들이 탔던 수송 열차의 번호다.  


1860년대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하자 굶주림을 피해 조선인들이 연해주 지역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 농토를 잃어 살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연해주로 향했다 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수많은 애국지사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한 거점 도시이기도 하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구소련 국경지역에 침입하기 시작한다. 전쟁 긴장감이 고조되자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에게 재판도 심리도 없이 ‘일본 간첩’이라는 유죄 판결을 내리고 강제 이주를 시킨다.


 

"철커덕 철컥, 철커덕 철컥……. "


사람들은 대부분의 재산을 남겨 둔 채 영문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연해주를 떠나야 했고,  가축을 운반하고 죄인을 호송할 때 사용하던 열차로 이동을 시작한다.



"할머니와 아빠가 태어난 조선, 해 뜨는 동해 바다. 그리고 내가 살던 연해주의 작은 마을, 수남촌. 우리는 거기서 얼마나 더 멀어져야 하는 걸까요."  


파란 눈의 러시아인들에게 어디에 데려가는 것이냐 물어보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503호 열차>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이제는 남의 나라 이주민으로 영문도 모른 채 어디에 하소연도 할 수 없는 현실의 답답함이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열차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자 사람들은 다시 삶에 대한 희망을 보기 시작하는 장면도 있다.  


“굶어 죽고, 아파 죽고, 추워 죽는 이 칸에 새 생명이 나온다” 하며 감격하는 목소리도 있어요.  

“쥐마, 세르게이, 막심, 니콜라이, 유리, 알료샤, 안드레이, 줴냐, 드미뜨리…….”아기에게 붙여 줄 이름이 줄줄이 나와요. “할아버지가 계셨으면 조선 이름을 지어 주었을 텐데.”


자신의 뿌리를 귀하게 여기지만, 새 생명의 이름으로 죄다 러시아 남자아이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미 그들은 조선인도 아니고 러시아인도 아닌 주변인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주인공 소년의 할머니가 임종 전 귀하게 보관하던 보물로 전해주는 씨앗을 보면 '벼, 밀, 보리, 배추, 무, 상추, 열무, 호박…….' 죄다 조선의 씨앗이다.


 

"찬바람이 사방에서 휘몰아쳐요. 우리를 반겨 주는 것은 바다처럼 넓은 벌판과 차갑게 휘몰아치는 겨울바람, 무성한 갈대뿐입니다. 그리고 지는 해가 갈대밭 너머에 있어요. 누군가의 눈에서 흐르는 핏방울처럼 새빨갛고 둥근 해가."


고운 석양빛이 '핏방울처럼 새빨갛고 둥근 해'같이 느껴지는 그 막막함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실제로 도착했던 그 해, 1937년생이 귀하다고 한다. 이주 초창기 고려인들은 토굴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스탈린 정권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에 죽든 말든 고려인들을 던져놓은 것이다. 나라 없는 식민 시대 사람들의 서러움이다.


 

“우거덕 우거덕 파도친다. 에헤야 뿌려라…….”


실제로 고려인들은 그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관개수로를 확충하는 등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다. 쌀, 목화, 밀 등을 생산하는 벼농사 개척의 선구자로 '사회주의 노력영웅’이라는 칭호를 가장 많이 받는 우수한 소수민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남았다. 눈물겨운 이민사 편을 읽고는 숙연한 마음이 든다.



*제5회 정채봉 문학상 대상 수상작, 소설 <503호 열차> 허혜란 작, 샘터 출판사.

본문의 대사 일부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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