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평소에 KBS라디오 93.1을 틀어놓는다. 클래식 음악, 월드 음악, 성악 등 하루종일 광고 없이 음악만 나오는 이 채널은 일상생활의 배경처럼 듣기에 맞춤한 듯하다. 나는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채널을 추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국민학교 들어가던 해에 피아노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동네에서는 여자아이들은 거의 피아노 학원, 남자아이들은 태권도 학원을 다녔는데, 우리 부모님도 그 유행에 맞춰, 오빠를 태권도 학원에 보내고, 나는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어린이바이엘과 동요집을 뚱땅거린 지 몇 달 후, 우리 집에는 업라이트 피아노가 한 대 들어왔다. 여덟 살 인생에서 갖게 된 물건 중 가장 값비싼 마호가니 컬러의 영롱한 그것을 만나던 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음악학원을 그만두어야 했다. 솔직히 6년 내내 다닌 학원이 지겹기도 했다. 이후, 나는 카세트플레이어와 이어폰을 끼고 살며 팝과 록음악에 빠져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클래식 음악에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루이스 터커(Louise Tucker)'의 팝송 'Midnight blue'를 듣고, 어! 이거 익숙한데? 하던 순간이었다. 그 멜로디는 바로 '베토벤(L.v.Beethoven)'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Piano Sonata No.8 in c minor)'의 2악장이었다.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관심도 없는 그 음악들의 상관관계를 스스로 알아냈다는 사실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다음으로 찾아낸 것은 '라흐마니노프(S.Rachmaninov)'의 교향곡 2번(Symphony No.2) 3악장에서 선율을 가져온 '에릭 카먼(Eric Carmen)'의 'All by myself'였다. 또한, '드보르작(Dvořák)'의 교향곡 '신세계로부터'(Symphony No. 9 "From the New World")의 4악장 초반부를 듣는 순간 자동으로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영화음악 'Jaws'를 떠올렸다. 클래식 음악은 이처럼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생활 곳곳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예전 자동차 후진 시 경고음악으로 '엘리제를 위하여(Für Elise)'를 사용한다던가, 지하철 환승역 알람으로 비발디의 협주곡(L’Estro Armonico Op 3, No 6)이 흘러나오는 등으로 말이다. 프랑스 영화 '언터처블-1%의 우정'에도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장면이 나온다. 진지한 실내음악회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y-Korsakov)'의 '왕벌의 비행(Flight of the Bumblebee)'을 들은 드리스는 곧바로 만화영화 '톰과 제리'를 외치고, 그 말은 들은 필립은 환한 웃음을 터트린다.
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평창의 시골마을에서 열린다는 클래식축제에 대해 들었다. 배추와 감자 밭농사가 주요 산업인 작은 마을의 초등학교는 학생이 점점 줄어 폐교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고심 끝에 학교는 아이들에게 악기 하나씩을 가르쳐 졸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별빛오케스트라'라는 방과 후 활동을 조직했다. 때마침, 문화생활에서 소외된 오지마을을 대상으로 '아트빌리지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현대자동차재단'과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전국을 찾아다닌 끝에, 전북 남원에서 '동편제거리축제'와 강원 평창에서 '계촌클래식축제'를 열었다. 이것을 기회로 계촌초등학교의 음악교육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젊은 학부모들이 이사를 오고 학생수가 증가했다. 이 축제는 대기업의 후원사업과 전문교육기관의 노력이 함께 만들어 낸 모범적인 예술마을의 사례로 소개되면서 점점 규모를 키웠다. 나는 일정과 아티스트의 리스트를 확인하고는, '시골에서 열리는 그저 그런 지역행사가 아니잖아!'라고 짐작했다. '서울시향'과 '선우예권'이 헤드라이너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숙소부터 찾아 예약하고 평창으로 달려갔다. 풀냄새 가득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듣는 모차르트는 얼마나 달콤했는지 매년 이곳으로 여름휴가를 와야겠다 다짐을 한 것이 벌써 5년 전이다. 하지만 이듬해 팬데믹이 시작되어 나의 여름휴가 계획은 잠시 중단되었다. 2022년 드디어 축제다운 축제를 다시 열 수 있게 되었고 그 해에 초대된 연주자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이었다. 축제를 주관하는 '한예종'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운 좋게도 이 연주자가 '반 클라이번 콩쿠르(Van Cliburn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에서 우승을 하기 전에 계약해 두었다고 했다. 애초에 천오백 명의 방문객을 예상했으나, 사전 신청자가 삼천 명을 넘었고, 뒤늦게 소문을 듣고 예약 없이 찾아온 사람들까지 더해져 관객이 사천 명이라는 둥 오천 명이라는 둥 그 여름의 작은 마을은 뒤엉킨 차량으로 카오스 그 자체였다. 이제 막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젊은 피아니스트의 강렬한 연주를 입은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은 초록이 가득한 숲과 드넓은 배추밭과 그곳에 모여든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생각해 보니 이 축제는 어느 해도 그냥 심심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팬데믹 기간 동안에도 피아니스트 손민수와 백건우 님이 온라인으로 공연을 했다. 작년 여름에는 피아니스트 조재혁과 아레테 콰르텟이 열정적인 슈만을 연주했다. 아홉 번째 축제를 마치는 날 주최 측에서는 2024년은 축제의 10주년이니 기대해도 좋을 공연을 만들겠다는 의미심장한 공지를 띄웠다. '누구를 초대했길래 저리 자신만만한가' 궁금했던 나는 제10회 계촌클래식축제의 라인업을 보고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별빛콘서트 연주자: 피아니스트 조성진!>
'뭐라고? 조성진이? 평창에 온다고?'
심지어 지휘는 이제 막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한 정상의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맡았다고 했다. 이건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공연이었다. 예년보다 더욱 풍성한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축제의 삼일째 되는 날 아침, 슈퍼스타가 뜬다는 소식에 마을의 주차장은 이미 빈 공간이 없었다. 티켓부스에 갔더니 내 앞에 선 줄이 벌써 몇 백 명. 예약을 했음에도 뙤약볕에 한 시간을 넘게 서서 겨우 받아 든 번호는 460번. 사전 신청자가 만육천 명을 넘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다 온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일본에서 날아온 어떤 팬은 전날 밤에 와서 티켓부스 앞에서 노숙을 했단다. 세상에나! 저 정도는 되어야 팬이구나. 나는 고작 음반이나 구입하고, 콘서트도 드문드문 찾아다니는 주제에 팬이라고 명함을 팠구나.
쇼스타코비치(D. Shostakovich)의 피아노 협주곡(Piano Concerto No.1)을 연주하는 조성진의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보며 나는 엉뚱하게도 길었다던 리스트의 손가락이 저 모습 같을까? 생각했다. 어려운 곡이지만 도드라지는 트럼펫 소리와 함께 신들린 듯한 피아노 연주로 30분이 어떻게 지났을까 싶게 끝나고 천둥 같은 박수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앙코르곡을 연주할 차례에는 지휘를 하던 김선욱이 갑자기 피아노에 함께 앉았다. 두 명의 선후배 피아니스트 - 네 개의 손이 연주하는 브람스(J. Brahms)의 '헝가리 무곡 5번 (HungarianDances No.5)'이라니!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장면을 눈앞에서 마주한 관객들에게서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삼천 평이 넘는 공간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모든 사람들이 그 순간만큼은 하나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통영, 구례와 더불어 매년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과 투명한 하늘이 기다리고 있는 평창을 찾는다. 이번에는 또 어떤 아티스트가 놀라운 연주를 보여줄까 기대를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