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성을 들이는 일
살아오면서 딱히 ‘이것이 내 취미’다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 뭘 취미로 가지려면 어느 정도 정성을 들여 입문에 따른 번거로움을 넘어서야 하는데, 천성이 진득하지 못해 이것저것 찝쩍거리기만 해서 취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우연히 ‘필사’라는 것을 시작했다. 노트를 하나 정해 좋은 글귀를 정성껏 옮겨 적는 것인데, 글씨를 한 자 한 자 쓰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무엇보다 자주 해도 지루하지 않고 바빠서 며칠 못 하면 마치 운동하던 사람이 안 한 것처럼 찌뿌둥해서 다시 하게 된다. 처음에는 ‘딥펜’(펜촉에 잉크를 찍어 쓰는)으로 썼는데 번거로워서 지금은 만년필을 사용한다.
요즘은 ‘산에는 꽃이 피네’ 등 법정 스님의 수필과 최명희 작가의 ‘혼불’을 주로 옮겨 적는다. 법정 스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다. 스님의 글은 언제 읽어도 좋다. 글을 읽다 보면 어디선가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것 같다. ‘혼불’도 내가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느낌과 생각을 그야말로 글솜씨 좋은 작가가 열심히 조사하여 쓴 것이라 내용이 다채롭고 표현이 맛깔나다.
어제 아침에는 일찍 일어났기에 ‘혼불’ 6권을 필사했다. 그 내용 일부를 옮겨 적는다.
“말 안 해도 헤아려 알아야만 양반이지. 그리고 무엇이든 다 손수 할 줄 알아야 한다. 비단을 다듬기를 달걀과 같이 반들반들하게 하고, 베를 다리기를 매미의 날개처럼 아늘아늘 하게 하는 것이, 아랫것들 시켜서 될 일이냐?”
음...... 양반, 아랫것 등의 표현이 눈에 거슬리기는 한다. 각각 ‘리더’와 ‘팔로워’로 바꾸면 조금 부드럽게 들리려나.
어쨌거나 좋은 리더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아도 미리 그 심정을 헤아려 반응하는 사람이 아닐까. 악에 받쳐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야 마지못해 내 심정을 알아준다면 그런 사람을 리더로 믿고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이는 비단 리더와 팔로워의 관계뿐만 아니라 부부, 친구, 연인, 부모와 자식 등 모든 인간관계에 확대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서로 소리를 내서 얘기해야 비로소 상대방의 심정을 알아차린다면 이미 그 관계는 많이 손상된 관계일 수도 있다.
제조업을 10년 이상 하다 보니,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일에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겠다.
아내와 나는 요즘 주로 빵을 구워 판다. 고구마, 당근, 양파 등 야채를 듬뿍 넣은 반죽을 성형 틀에 넣고 오븐에서 굽는다. 그런데 오븐이 크다 보니 오븐 내 위치에 따라 온도가 일정치 않아 중간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위치를 바꿔주어야 한다. 아내는 반죽 상태를 봐가며 이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처음에는 적어도 5번 이상 넣었다 뺐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은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는 법이다. 요즘은 중간에 한 번만 바꿔줘도 빵이 골고루 잘 익는다.
그런데 이 과정을 누구에게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갑갑해진다. 물론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의욕이 있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수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내와 같은 집중력을 발휘하여 빵 굽는 법을 단기간에 터득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배우는 사람의 능력을 얕잡아 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마음 자세의 문제이다.
“무엇이든 손수 다 할 줄 알아야 한다....... 반들반들하게 하고,...... 아늘아늘 하게 하는 것이 아랫것들 시켜서 될 일이냐?”
아랫것들이 할 수 없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왜 주인이 하는 것처럼 반들반들하게 못 한다는 것일까....... ‘정성’ 아닐까? 최명희 작가는 “정성을 들이는 일은 주인만이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