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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J Jan 22. 2024

<너와 나>로 대신하는 안부

영화 <너와 나>를 보고

<너와 나>로 대신하는 안부 

2023년 12월, - 영화 <너와 나>를 보고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와 ‘친할머니’, ‘외할머니’를 구분 짓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내게 할머니는 딱 한 분 밖에 안 계셨기 때문이다. 후에 학교 수업을 통해 배웠다. 아버지 쪽의 가족을 ‘친가’, 어머니 쪽의 가족을 ‘외가’, 그리하야 아버지의 부모님은 ‘친’을 붙이고 때로는 이것을 생략하기도 한다는 것을.      


  유일한 조부모라고는 ‘외할머니’밖에 없었던 나는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의 죽음은 꽤나 충격이었다. 사람이 이렇게나 하루아침에 죽을 수가 있구나, 그런데 그런 사람이 바로 내 유일한 조부모이자, 엄마의 유일한 엄마라니.      


  무엇보다 할머니는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 점이 엄마를 미치게 만들었다. 당시 할머니는 치매 증상이 심해져 근처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지금보다 철부지였던 나는 할머니를 한 번도 뵈러 간 적이 없었고 엄마는 먹고 살기 바빠 자주 할머니를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적당한 죄책감과 일상의 피곤함 사이에서 그날도 어김없이 ‘다음에 가야지’라는 말로 미뤄왔던 그 날,      

  그 하루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장에서의 엄마는 땅을 치며 후회하며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느낀 감정은 '공포'였다. 누군가의 탄생엔 예정일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어도 누군가의 죽음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 곁에 아무도 없을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전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졌다. 봇물 터지듯 할머니와의 추억이 떠올랐고 엄마 역시 마찬가지인 듯 했다. 할머니, 엄마, 장모님, 그때 제가 죄송했어요, 앞으로는 잘 살게요 , 라는 말. 전할 수 있는 창구가 없음에도 할머니 기일이 되면 언제나 비슷한 말들이 수없이 하늘에 전해졌다.

     

  물론 단 한 번도 답장을 받은 적이 없다. 할머니가 우리를 용서했는지, 자식네들을 안타까워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날 혼자 남겨둔 것에 여전히 서운한 마음을 품고 계시는지, 그것말고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지, 그곳은 어떤지,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 영화처럼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상상해봤지만 엄마의 꿈에도, 나의 꿈에도 나타나지 않으신다.     


  그렇게 답 없는 이에게 안부를 물은 지 10년이 더 되어간다. 앞으로 이 기간은 10년에서 20년으로, 20년에서 30년으로 늘어나겠지. 영영 받을 수 없는 답을 기다리는 시간, 영화 <너와 나>가 보여준 꿈 같은 시간은 이기적이지만, 잠시나마 할머니의 안부를 헤아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누군가 이 영화는 영화관에서 빠져나온 순간부터 시작되는 영화라고들 하던데 그 말은, 우리가 겪은 예상치 못한 ‘안녕’에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별하고 나서야 헤아리게 되는 상대의 마음, 떠나고 나서야 그리워하게 되는 마음. 생의 마지막이 아닌, 그 이후에라도 전하고 싶은 말들.     


  만약 어느 날,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누구도 준비할 시간 없이 세상과 이별하게 된다면 남은 이들에게 이 영화를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답 없는 안부를 묻지 않아도 좋으니 이 말로 위로 받고 때때로 나를 기억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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