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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점 Oct 20. 2023

첫사랑에게 걸어갔다. Andante

스물한 걸음

 피시방 한 공간을 고등학생 남자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게임하던 유성 헤드셋이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유성은 일어나 카운터로 가다가 멈춰 섰다. 구석에 은오가 쪼그려 자고 있었다. 가만히 보다가 다가갔다. 땀을 흠씬 흘리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겠다.


 “야, 야.”


 꿈쩍도 안 했다. 유성은 이마에 손을 짚었다.


 “흐으.”


 불덩이였다. 자세히 보니 울다 잠든 눈이었다. 은오 손목에 끼워진 검은 봉지를 열어봤다. 컵라면 쓰레기였다. 사이가 예전 같으면 깨워서 괜찮냐고 물을 텐데 지금 사이론 유성을 보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릴 것 같았다.


 이마에 손을 대고 있으니 은오가 미간에 힘을 주며 뭐라 중얼거렸다. 놀란 유성이 거두자 은오가 그 손을 탁 잡았다. 손도 뜨거웠다. 당황해 가만히 있는데 은오가 작게 말했다.


 “아빠.”


 은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다시 작게 웅얼거렸다.


 “목말라.”


 유성 팔을 잡은 은오 손에 힘이 슬슬 풀렸다. 유성이 손을 치우자 은오가 다시 잡았다.


 “가지마.”


 유성은 그대로 한참 가만히 있었다. 은오가 훌쩍거리며 희미하게 말했다.


 “보고싶어.” 


 유성은 그대로 곁에 있었다. 한참 후 손을 살살 빼자 은오는 가만히 있었다. 그대로 피시방을 나왔다. 체인점에서 죽을 약국에서 약을 편의점에서 보리차를 사서 다시 왔다. 은오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물건들을 은오 팔에 걸린 봉지 안에 다 넣었다. 깨지 않았다.


 뒤돌았다. 그냥 가기가 밟혔다. 다시 돌아 봉지에 만 원을 넣으며 말했다.


 “택시 타고 가.”


 가다가 다시 돌아보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카운터에 가서 알바생에게 말했다. 


 “22번 자리 좀 이상해요. 심하게 아픈 것 같은데.” 


 알바생이 카운터에서 나와 은오 자리로 향했다. 유성은 멀리 떨어져 지켜봤다. 은오가 일어났다. 힘든지 서성이더니 멈칫 봉지를 열어보더니 들고 피시방을 나갔다. 유성은 따라나갔다. 하늘이 정성을 알아준건지, 은오가 봉지에서 만원을 꺼내더니 택시를 잡았다. 유성은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다시 피시방으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왔냐?”


 재원이 물었다. 유성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었다. 게임할 돈이 한 푼도 없었다.          




 2013년 4월, 2학년 13반에 친구를 보러 온 소희가 유성 앞에 털썩 앉았다.


 “야, 너 니 여친 냅두고 왜 자꾸 김은오 보러 가냐?”


 유성은 말이 없었다. 소희가 책상을 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수 생일 언젠지 알아? 이럴 거면 은오랑 왜 헤어졌냐? 니 구라 까지말고 솔직히 말해봐. 김은오가 이지형 좋다고 너 찼지?”


 유성이 지형 어깨에 기대 누운 채 멈칫 굳었다. 그제야 소희를 쳐다봤다. 


 “아니거든.”


 소희가 픽 미소지었다.


 “맞네.”


 유성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헤어지자고 했어. 이지수 마음에 들어서.”


 “얘 중학교 때부터 이지수 좋다고 했음.”


 유성 귀가 빨갰다. 도와주는 지형이 고마워 눈물이 날듯했다.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지수 생일이 언젠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유성을 똑바로 보며 소희가 비웃었다. 


 “오늘이야. 정신 차려.”


 말하고 교실을 나갔다.


 유성은 사물함을 열었다. 화이트데이 날 애들한테서 받고 안 먹었던 초콜릿들을 뒤졌다. 있었다.


 “오.”


 돌려보며 감탄했다. 정교히 포장한 수제 초콜릿이었다. 


 쉬는 시간에 지수가 13반에 나타났다. 창가 쪽에 앉은 친구에게 다가가면서 유성을 힐긋거렸다. 보고 있던 유성이 눈웃음을 치며 일어나 다가가자 멈춰 서서 쳐다봤다. 유성이 선물을 내밀었다. 


 “어! 헐, 야, 저기 봐.”


 애들이 모여들어 둥글게 에워쌌다. 지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선물과 유성을 연신 번갈아 보며 입꼬리를 달싹였다. 이제 보니 지수도 뭔가 들고 있었다. 지수가 손에 든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뭐야?”


 “너도 내일 생일이잖아.”


 유성이 스치듯 움찔했다. 받으며 진심으로 말했다.


 “고마워.”


 “뽀뽀해! 뽀뽀해!”


 애들이 박자 맞춰 손뼉 쳤다. 지수 얼굴이 분홍색이 되었다. 유성은 지수에게 입술을 갖다 대는 자신을 상상하다가 멋쩍게 웃었다. 애들이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 계속 소리쳤다. 지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유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지수에게 다가갔다. 환호성이 거세졌다.


 “진짜 고마워.”


 유성은 두 팔로 지수 등을 토닥이고 떨어졌다.               




 몇 주 후 5교시 국어시간, 도서관 수업이었다. 모두 각자 책을 골라 열람석에 앉았다. 유성은 책을 고르려 늦게까지 어슬렁거렸다. 아무도 가지 않는 책장이 있는 왼쪽 끝을 쳐다봤다. 열람석을 놔두고 항상 저기 앉아 책을 보는 백삼십을 떠올리며 다가갔다.  


 깜짝 놀란 유성은 멈췄다. 은오가 팔꿈치를 받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늘 그러듯 폐서 더미 위에 앉아있었다. 지수와 선물을 교환한 날 싸우고 나서 처음이었다. 은오는 유성이 온 줄 모르고 있었다. 유성은 가만히 서서 쳐다봤다. 울고 있지 않은데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유성은 이유 없이 가슴이 쿡 찔렸다. 다가가 책꽂이에 등을 기대고 섰다. 은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시야에 나타난 유성 신발만 바라보았다.


 “수업 안 들어가고 뭐하냐?”


 은오는 꼼짝하지 않았다. 


 “가기 싫어.”


 “가기 싫어도 가야지, 수업인데.”


 조용했다.


 “애들이 너 따 시키냐?”


 말없는 은오를 내려다보는데 가슴에 물이 찬 기분이 들었다. 


 “나랑 같이 다니자.”


 유성이 나직이 말했다. 그러면 애들이 함부로 못 할 텐데. 호구라고 욕을 퍼붓는 지형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은오가 고개를 천천히 작게 저었다. 유성은 자기에게만 들리게 작게 한숨지었다. 한참 정적이 감돌았다.


 “작년에 기억나? 동아리 신청기간에.”


 유성이 건드리기 싫은 좋았던 과거를 꺼냈다.


 “우리 아직 별로 안 친했었을 때.”


 은오가 미세하게 미소지었다. 오랜만이었다. 유성은 그 모습이 간절하게 반가웠다. 놓치고 싶지 않아 속이 탔지만 바로 사라졌다.


 “그때 너가 만 원 내에서 나 원하는 거 하나 무조건 들어주기로 했었는데.”


 지금이랑 전혀 색깔이 다르던 순간이었다. 유성은 가만히 서 있다가 말했다.


 “너랑 키스하고 싶다.”


 말해놓고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은오는 여전히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망갈까? 유성은 실언한 입을 때리고 싶었다. 은오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거 천만 원 짜린데.”


 은오가 일어나 폐서 더미를 밟고 섰다. 


 “나중에 줘야 된다, 구백구십구만 원.”


 은오 키가 유성보다 약간 커졌다. 둘은 마주 보았다. 은오가 두 손으로 유성 얼굴을 감쌌다. 유성은 당황한 눈빛을 했다. 은오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유성 얼굴에 다가가 입을 맞추고 키스했다. 책꽂이 뒤로 문학 선생님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성은 실실 웃으며 걸어갔다. 어쩌면 백삼십이랑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자 사건쯤이야 사과받고 용서해주지 뭐…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쟤네 집 되게 가난하대.” 


 유성이 교실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다른 반 남자애들이었다. 유성이 다가가자 흠칫 놀라 쳐다봤다.


 “뭐라고?”


 둘은 입을 다물었다. 


 “너네 우리 집 가봤어?”


 교실에서 지형이 친구와 장난치며 나왔다. 유성이 돌아봤다.


 “야, 지형아. 우리 집 가난해?”


 “갑자기?”


 “얘네가 그렇대.”


 지형이 피식 웃었다.


 “니네 왜 그러냐?”


 “어디서 들었는데?”


 유성이 물었다. 둘 중 하나가 대답했다.


 “나도 들은거야.”


 “뭘 들었는데. 무겁냐?”


 둘이 눈치를 보며 웃으려다가 정색한 유성에 표정을 가라앉혔다.


 “뭘 들었냐고? 또 뭐? 더 말해봐.”


 언성이 높아지자 눈치를 보며 말했다. 


 “너 두더지라고…그러는 거 들었어. 나도 그냥 들은 거야. 몰라, 나.”


 “두더지?”


 “지하 산다며.”


 유성이 말을 멈추고 쳐다보기만 하자 둘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 소리 누가 했냐?”


 다가온 지형이 물었다.


 “김은오가 그랬대.”          


 유성은 영혼 없는 사람처럼 허공만 쳐다봤다. 같은 반 호민이 왜 이러냐고 지형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지형이 수근거려 말해주자 호민이 말했다.


 “그게 걔가 퍼뜨린 거였어?”


 유성이 갑자기 황급히 일어났다.


 “어디 가게?”


 지형이 물었다.


 “직접 물어보게.”


 “야! 니가 물어보면 걔가 맞다고 하겠냐? 야, 진정하고 앉아봐, 좀.”


 지형이 유성을 반강제로 앉혔다. 


 “내가 가서 슬쩍 물어볼게. 걔랑 안면 있어.”


 지형이 호민에게 동의했다. 호민은 교실을 나가 9반으로 달려갔다. 옆에 앉자 공부하던 은오가 고개를 들었다.


 “야, 김은오. 나 물어볼 거 있어.”


 은오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애들이 너가 좀…막…이상한 말을 하고 다녔대.”


 “무슨 말?”


 “너가 유성이 집이 가난하다 뭐 그런 말 했었다고 애들이 그러는 거야.”


 호민이 은오를 쳐다봤다. 은오가 부인하는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내가 아까 화장실에 있었거든. 근데 1학년들이 들어와서 얘기를 하더라고. 정유성이 어떤 발작하는 사람이랑 같이 걷는 걸 봤대. 그 사람이 애인이라면서 그 사람이랑 갈 데까지 갔다면서. 둘이 엄청 비싼 호텔 프런트에 있는걸 봤대. 그러면서 정유성 집이 돈이 많아서 그런 데 어른들하고 들어가고 그런다는 거야.”


 “미친. 그래서?”


 “내가 나가서 그랬어. 나 걔 잘 아는데 그거 아니라고. 그분은 애인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걔 그런 호텔 다니며 이상한 짓 할 만큼 잘 사는 애 아니라고. 지하 살고, 부모님 새벽부터 일 하시면서 부지런하게 사시는 분들이라고.”


 호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가 잘못했다.”


 은오가 호민을 쳐다봤다.


 “유성이가 너한테만 그 사정 알려준 거잖아.”


 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설사 변호라고 해도 발설을 하면 안 되지. 걔네는 그냥 어렴풋이 추측하며 지들끼리 궁시렁댄 거잖아. 유성이 원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 주렁주렁 따라다녀. 너가 그렇게 비밀을 폭로하면 확실히 보증된 소문이 크게 터지는 거지.”


 얼굴이 빨개져 대답하지 못하는 은오를 두고 호민은 일어나서 나갔다. 


 “뭐래?”


 돌아오자 지형이 물었다. 유성이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자기가 소문낸 거 맞대. 너네 부모님...뭐...노가다 뛰고 너네 집 가난하다고. 지하 산다고.”


 유성은 얼굴부터 발끝까지 힘이 풀렸다. 짧은 순간 귀에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왜?”


 맥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싫다고 했잖아. 너무 싫다고 했잖아. 싫어 죽겠다고 했잖아. 근데 니가 멋대로 끌고 갔잖아!


 “왜겠냐? 니한테 차였으니까 복수하는 거지. 저거 진짜 미친년 아니냐?”


 지형 얼굴에 열이 올랐다.          




 유성이 3학년 복도에 비치된 테라스에 앉았다. 


 “자.”


 지형이 다가와 사이다를 칙 따서 내밀고 옆에 앉아 마셨다. 받아들고 내내 말이 없던 유성이 조용히 말했다.


 “걘 니가 뭐가 그렇게 좋을까?”


 지형은 아무 말 없었다. 유성이 두 손을 눈에 가져다 대더니 서럽게 울며 말했다.


 “야, 나 질투 난다고. 솔까 나 처음부터 니 싫었어. 너만 없었으면…”


 유성이 숨을 헐떡이느라 하던 말을 끊고 한참 서럽게 울었다. 갑자기 지형이 울음을 터뜨렸다. 유성은 손을 눈에서 떼고 지형을 쳐다봤다.


 “넌 니만 생각하냐? 중1 때 나 썸 타는 애 있다고 설레발 오지게 쳤던 거 생각나지, 걔 너랑 나랑 다니는 거 보더니 바로 나한테 니 여친 있냐더라. 그게 이지희였다! 2학년 때 윤민지, 내가 잘해보려고 온갖 계획 다 짰는데 또 니랑 사겼지. 난 그렇게 못 오를 나무라고 체념했는데 닌 딱 3일 만에 차버리더라? 3학년 때 내가 좋아하는 애 있다고 고백할 거라고 난리 쳤지, 생각나냐? 그게 김윤지다! 그래도 계속 같이 다녔다, 니 좋아서! 무인도에서 야자나 까먹을 돌고래 아이큐 새끼야.”


 지형이 어헝헝 울었다.


 “그래서 좋았냐? 고소했냐? 재밌었겠다!”


 “그래! 겁나 우쭐했다! 뒤에서 졸라 쪼갰다! 그렇게 뺏어가던 니가 고등학교 와서 엎어지게 좋아한 애는 나 좋아해서! 너 벌 받은 거야. 어...흑.”


 “니 진짜 싫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유성이 지형을 밀쳤다. 지형이 유성 멱살을 잡았다. 유성도 잡았다. 물어뜯고 끌어안으며 폼 떨어지게 싸워댔다. 지나가던 장미가 재원에게 물었다.


 “니 친구들 아니야?”


 “저런 찐따들 태어나서 처음 봐.”               




 2013년 5월, 유성은 혼자 하교하고 공원을 걸어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알아봤다. 은오였다. 유성은 천천히 걸어갔다. 완전히 사이가 박살나 모르는 척 지나가는 은오를 쳐다보며 걸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 물어보고 싶었다.


 저번에 내가 말이 심했어. 말하고 싶었다.


 얼굴 왜 그러고 다니냐? 궁금했다. 


 유성은 고개를 돌리고 은오를 지나쳤다. 한참 걸어가 공원을 빠져나왔을 때 뒤를 돌아봤다. 은오가 아까 유성과 지나쳤던 그 자리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미안해.


 김은오! 미안해, 지금 그렇게 외치면 용서해줄까? 입을 열고 들숨을 쉬어 말을 뱉으려다가 멈췄다. 좀 더 시간이 지난 후가 용서받기 쉬울 때라고 생각했다. 유성은 공원을 빠져나가는 은오를 쳐다보다가 뒤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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