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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쓰기] 16. 재채기와 죽

(2025.9.30)

by 엄마다람쥐

6시 반인데 어제도 오늘도 해가 숨어있다. 점점 가을이 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여름이 덥다 해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해가 반짝하고 있는 것은 참 좋았다. 너무 더워서 캘리포니아가 그립다고 하던 것이 얼마 전인데, 이제는 그 더운 여름을 생각하다니 사람 마음 알 수가 없다. 사실 아직까지는 괜찮다. 서늘한 정도, 밤바람 막아줄 짱짱한 샷시를 닫으면 될 정도니 괜찮다. 난방을 할까 말까, 몇 도로 맞춰야 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지금 이 날씨가 딱 좋다.


"에에취!", "에취!" "아츄!" 애들 코는 내가 딱 좋다는 이 온도와 습도가 영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재채기가. 아침 재채기는 보통 이렇게 온도가 갑자기 뚝 떨어질 때 시작되고, 그러다 코감기, 그러다 열이 나거나 중이염이 온다. 재채기는 우리 몸이 필요 없는 걸 꺼내려고 그러는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데, 재채기가 데려오는 증상들이 점점 대단해지니 내 신경은 바짝 곤두설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 무조건 더 먹여야 한다. 더 재워야 한다.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 하기 싫어도 애들 먹일 음식을 해야 한다. 요리하는 게 싫다고 글로 쓰고, 말로 하며 대성토를 해도 애들 재채기를 막을 방법은 이것뿐이니 내 몸은 자동으로 냉장고를 뒤지고, 도마를 꺼내고, 냄비를 올리고 가스레인지를 켠다. 병원 가기 쉬운 한국에 왔으니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 없고 애쓸 필요 없지 않나 싶지만, 한번 중이염이 시작되면 끝날 줄 모르고 계속 항생제, 비염약이 반복되는 사이클이 시작되기 때문에 애초에 아프질 말아야 한다.


다행히 아이들은 예전보다 밥을 훨씬 잘 먹고, 요즘 나오는 보라색 포도를 아주 좋아해서 계속 3킬로짜리 상자로 사다 나른다. 쓱배송은 항상 포도 한 상자를 넣고 시작한다. 둘째는 닭죽은 절대 노라고 했다. 절대 절대 놉! 미국에서 가장 끓이기 쉬운 죽이 닭죽이었다. 코스트코에서 파는 통닭구이를 사다가 살을 발라 먹고, 남은 뼈와 살을 넣고 마늘 넣고 소금 넣고 끓이면 삼계탕이 되었다. 아이가 아플 것 같으면 여지없이 닭죽을 한 솥 끓이고, 눈 뜨면 "먹어." 노는 아이 붙잡아다가 "먹어." 저녁 다 먹고도 디저트로 "한 숟갈만 더 먹어." 먹어 먹어 운동을 벌였다. 아이는 옆집 일본 엄마한테 우리 엄마가 맨날 먹으라고 한다고 만날 때마다 이야기했고, 일본 엄마마저 그 집 아이들한테 "다베떼 다베떼 구다사이" 하던 걸 "목오, 목오!" 할 정도였다.


미국에서 겨울이 끝날 무렵부터 우리 집에서 닭죽은 말도 꺼내면 안 되는 음식이 되었다. 코스트코 닭도 질리도록 먹었으니 이제 손이 가질 않는다. 여전히 그 닭을 만나면 닭죽 결사 반대하는 아이들 모습이 떠올라서 혼잣말로 "안 살게 안 사." 하고 돌아선다. 하지만 또 내가 누구냐! 병원 가는 걸 너무나 싫어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애들 아파서 밤잠 깨는 걸 닭죽보다도 싫어하는 나 아니겠는가? 어제저녁, 끓이기 시작했다. 큰 아이가 욕심내서 많이 구운 스테이크가 소고기 죽 쑤기 딱 좋게 남았다. 바로 죽이다. 소고기 죽. 양파 썰어 넣고 볶고, 소고기 넣고, 쿠쿠가 배 터지게 끌어안고 있는 밥을 팍팍 꺼내서 냄비에 넣고 물을 한가득 부어 끓였다. 애들은 케데헌을 보느라 냄새도 못 맡는 지경이었다.


"아! 해. 한 숟갈씩만 먹어." 둘째는 화들짝 놀랐다. "닭죽 안 먹어!!!!!!!!" 스프링 달린 것처럼 소파에서 튀어 오르더니 방으로 들어가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닭죽 아니야. 소고기 죽이라고. 너 밤에 열나면 다시 닭죽 끓인다. 어서 와." 새처럼 받아먹던 아이, "이거 좀 맛있네?" 한다. 소고기 죽에 참기름, 깨까지 뿌렸으니 당연히 맛있지! 맛도 간도 안 보고 끓인 건 비밀이다. 아이들 배가 빵빵하다. 이제 됐다. 나의 임무 완수! 오늘 아침도 소고기 죽이다! 배를 따뜻하게 가득 채우면 학교 가는 길도 덜 춥겠지. 눈 뜨자마자 "또 죽이야?" 해도 소용없다. 엄마는 강하다. "일단 먹어. 닭죽 끓이기 전에."


image.png?type=w773 Photo by Ben Whit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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