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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야 Dec 06. 2023

시골에서도 나는 매일 성취합니다.

소확행으로 '나' 돌보기



"나이도 젊은데 시골에 살면 지루하지 않냐고?"


주변 친구들이 종종 나에게 물어보는 질문이다. 도대체 하루종일 뭘 하길래 본가에만 가면 연락을 안 받냐고. 뭘 하면 휴대폰 없이 하루를 보내냐고 물어본다. 시골에서는 할 것도 없을 텐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궁금해한다.


나는 본가에서 만큼은 '느린 삶'을 산다.(사실 실천하려고 굳이 노력할 필요도 없다.) 집에서는 휴대폰을 잘 보지 않는다.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고, 가끔은 휴대폰을 이틀 넘게 충전하지 않아도 배터리가 충분할 때도 있었다. SNS를 조금만 봐도 매일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새로운 트렌드와 밈들 속에서 끊임없이 재미요소를 찾아내는 내 주변 친구들은 나를 정말 신기해한다.(그만큼 정말 중요한 연락 외에는 카톡도 잘 되지 않아서 '반응이 재미없어졌다.'며 서운해하는 친구도 생겼다.) 본가에 들어오고 나서 유튜브를 보지 않으면 스크린 타임(휴대폰 사용시간)이 하루 1시간이 최대인 날도 있다.(스스로도 놀래서 기록까지 했었다.)


집에만 있어도 정말 바쁘다. 집에서 쉬면서 에너지를 채운다. 이 말에 내가 내향인이고 I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외향인이 확실하다. 집에서의 휴식조차도 '혼자'가 아니다. 엄마랑 수다 떨기만 해도 2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요 근래는 부모님의 갱년기가 절정에 달하고 있다. 엄마는 그래도 점점 극복하고 있는 듯 하지만 요새 아빠가 큰 변화를 보여줄 때마다 나는 흠칫 놀라곤 한다. 부모님이 갱년기를 보낼 때 내가 집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들이 무지 많다. 엄마는 나한테 6살 아래 되는 막둥이 남동생이 있지만 딸 중에 막내인 게 티가 난다고 한다. 엄마 옆에 붙어있기를 좋아하고, 조잘조잘 사소한 것들도 떠들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서 엄마랑 매일매일 TV를 보거나 차를 마시거나 심심하다고 느낄 때마다 계속 엄마 옆에서 장난을 친다.


둘째 언니는 늘 출퇴근 시간마다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그게 언니가 엄마를 챙기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전화가 없으면 엄마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둘째 언니한테 전화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했다.(나는 집에 오고, 오래 있기를 좋아하지 안부전화를 잘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둘째 언니 얘기를 듣고 많은 반성을 했달까.) 멀리 있을수록 전화 통화 한 번이 진심이 되는 걸 난 몰랐었다. 통화가 짧아도 "엄마 오늘 뭐 했어요? 저녁은 먹었어요?" 늘 챙기는 둘째 언니다.


둘째 언니가 내가 본가로 들어온지 한 달이 지났을 때쯤 말해줬다. 내가 집에 들어오고 나서는 언니가 전화를 하지 않아도 엄마가 곧바로 언니한테 전화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했다. 하루 이틀 정도 통화하지 않아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엄마의 외로움이 줄어든 것 같다고 말해줬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이 한 달간 나의 소소한 성취 중 하나는 '엄마와 시간 보내기'였다. 물론 지금도.



집에 무지개가 뜨는 순간을 좋아한다.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든다. 특히나 왼쪽 사진은 비가 와서 흐렸었는데 갑자기 맑아지더니 무지개가 뒷마당에 떳었다. 그 부분만 맑아졌었다.




하루에 하나씩 성취하는 중입니다.


'성취하다'는 말이 예전에는 엄청 크고 거창한 의미로 느껴졌다. 내가 생각한 '목표'라는 것이 큰 의미로 느껴져서 '성취하다'는 말조차도 가볍게 쓸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골에 들어와서는 그 의미를 달리 해석하기로 했다. 확실히 시골의 삶은 여유가 있어서 좋긴 했지만 노력하고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다른 친구들의 SNS를 보면 내가 지내는 삶이 지루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할 수 있는 매일의 목표를 하나씩 성취해 보기로 했다.


처음엔 목표라고 생각하고 했던 일들은 아니었다. 그냥 자기 전에 오늘은 내가 뭘 해냈는지 떠올리면 그 작은 일들도 끝까지 해내고자 하는 의지로 시작되었기에 나의 목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골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기억나는 일들 중에 나의 소소한 하루 간의 성취들을 적어보겠다.


- 부모님과 시간 보내기 : 집에 있는데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따로 마음먹고 시간을 보내는 건 쉽지 않았다. 더 사소하게 적어보자면 아빠의 어린 시절 물어보기, 엄마의 대학생활 얘기 들어보기, 엄마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같이 보기, 아빠한테 내가 마음에 드는 아빠 작품 알려주기 등이 있다.

- 브런치 글쓰기 : 꾸준히 쓰고 싶은데 너무 어렵다. 꾸준히 글 쓰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 감자 집 청소하기 : 우리 집엔 12살 된 할아버지 '감자'가 살고 있다. 중형견이지만 체구가 작다. 2012년 초에 한 손님이 4~5개월 정도 된 감자와 다른 형제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왔었는데, 그중에 감자가 아빠 작업실에 숨어 들어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드렸더니 그냥 우리가 잠시 데리고 있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데리고 살고 있다.(그때도 이미 우리 집엔 큰 풍산개 2마리가 있어서 개를 키우는 환경은 마련되어 있었다.) 집에 많은 도자기를 두고 있어서 실외에서 키우고 있다. 야외 집을 둬서 집 청소는 마음을 먹고 해야 한다.

*개를 키우게 된 일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 집에는 개가 없었던 적이 없다. 지금은 감자를 빼고 모두 하늘나라로 가버렸지만 아직 다 기억한다. 16살이었던 애꾸(오드아이였는데, 아빠가 그냥 이름을 애꾸라고 했다...너무해...), 13살이었던 소심이(소심이는 2011년에 다 큰 성견이었던 상태로 만났다. 공부방을 마치고 둘째 언니랑 닭다리 과자를 먹으면서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 큰 아이가 과자 냄새에 우리를 뒤따라왔다. 너무 무서워서 뛰지는 못 하고 울면서 집으로 왔는데 아빠가 놀래서 나왔다. 저녁이었고 목줄도 하고 있던 상태인지라 일단 우리 집에서 임시보호를 하고 주인을 찾아다녔다. 주인 소식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임시보호를 10년 넘게 했다.)

- 마당 가을 낙엽 치우기 : 예전엔 몰랐다. 이 많은 낙엽을 아빠 혼자서 쓸고 치웠는지. 마당이 그래서 깨끗했던 것인지. 낙엽은 왜 자꾸 치워도 생기는지 정말 예쁜 쓰레기다.

- 작업장 정리하기 : 작업장에도 바람이 불면 가마 앞에 낙엽이 한가득 쌓이고 거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치고 버틴다. 오늘 허리 아픈 아빠를 위해 빗자루 하나와 쓰레받기를 들고서 구석구석 작업장 청소를 했다. 에어 컴프레셔로 마무리해 주면 쾌감이 미친다. 하나를 해도 꼼꼼하고 제대로 해야 적성에 풀린다.

- 아빠 장작나무 관련 일 도와주기 : 허리디스크 수술을 벌써 2차례나 한 아빠다. 허리를 삐끗해서 큰일이 났다. 그래서 아빠가 나무작업을 해야 할 때 내가 잘린 장작을 다 옮겼다. 나름 한 힘쓴다.

- 남동생 방 전선정리 하기 : 부품과 관련된 전선 정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여태 하려고 마음먹기만 했던 남동생 책상 아래 컴퓨터 전선 정리를 어제 아침부터 싹 했다.

- 보고 싶었던 드라마 몰아보기 : 디즈니플러스 '무빙'을 너무 보고 싶었는데, 디즈니플러스 구독을 하지 않았던 상태였다. 최근에 구독을 해서 엄마랑 무빙을 봤다. 봉석이 너무 귀엽다. 아니 강훈이..최애를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다.

- 엄마가 먼저 말하기 전에 스스로 집 청소하기 : 자취방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스스로 모든 청소를 해야 한다. 하지만 본가에서는 스스로 하기 쉽지 않다. 쓰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며 잔소리하는 엄마가 있다. 그래서 엄마가 먼저 청소기 밀기나 걸레질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해놓는 일? 이건 서프라이즈 중에 하나인 건 모두가 느낄 것이다. 그걸 내가 해냈다.

- 독서하고 엄마랑 감상평 나누기 : 최근에 엄마가 읽어서 좋아한 책을 나도 따라 읽어봤다. 엄마랑 감상평을 나눴다. '김경일의 지혜로운 인간생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관계에 대한 공감을 크게 했다.

- 학교에서 배우거나 느낀 내용 엄마 아빠한테 설명해 주기 : 수업은 자기소개서 및 면접 수업이지만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되려 자존감을 키우는 것에 많은 내용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내가 수업 중에 한 활동들을 엄마, 아빠랑 같이 해보기도 했다.

- 화장품 정리하기 : 화장을 하다 보면 브러시 청소가 얼마나 귀찮은지 모른다. 묵힌 때를 싸악 씻어 내린 브러시를 쓰면 화장이 무지 잘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감자 털 정리해 주기 : 감자는 마당에 풀어두고 키우는데, 조용한 동네라서 함께 산책하는 길 따라 혼자서 동네 산책을 하고 오기도 한다. 요즘은 맨날 도깨비풀을 온몸에 붙이고 와서 매일 떼주고 있다. 미칠 것 같다. 그만 붙이고 오라고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 감자는 여태 우리 집에서 자란 다른 개들과는 너무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지만 슬며시 다가가서 앉아있기를 좋아하고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아니면 절대 짖지도 않는다. 늙어서 기운이 없나 싶다가도 아직 쌩쌩 잘 달린다. 귀여운 감자다.

- 계절이 바뀔 때 우리 집 사진으로 기록하기 : 여름에 와서 지금은 가을을 넘어 겨울이 되었다. 계절은 늘 바뀌지만 늘 바뀐 마당 풍경은 매년 조금씩 다르다. 그 재미를 사진으로 매년 담아낸다.




귀여운 우리 감자다. 사람들이 6살쯤인 줄 안다. 동안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더 많지만 다 적어내면 너무 길어지니까 조금 참아보려 한다. 적고 나서 발견한 내용은 대부분의 나의 성취가 '청소'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나도 쓰면서 또 하나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생각해 보니 나는 평소에도 정리정돈을 즐기는 편인데, 정리되지 못한 컴퓨터 바탕화면을 보면 가끔 화가 날 때도 있다.


어찌 보면 하루하루 작은 일이지만 오늘 무엇을 해결했는지 떠올렸을 때 이런 기록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매번 큰 성취만 할 수 없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작은 성취감을 만드는 일은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어제랑 비슷한 하루를 보내는 게 '일상'이다. 하지만 '비슷'은 하나 '똑같다'는 아니다.


어제 먹은 음식을 오늘 다른 레시피로 먹어보는 것. 매일매일 새로운 양말을 신는 것. 오늘은 새로운 머리 고무줄을 써보는 것. 새로 바꾼 섬유유연제를 써보는 것. 집 청소를 해보는 것. 밀린 업무 해결하는 것 정말 더 작게는 오늘 하루 엄마 잔소리 피해보기도 다 다른 하루를 보내면서 일어난다.(잔소리 피해보기는 성공한 적이 없다. 매번 새로운 내용으로 생성된다.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요즘 나는 진정한 '나'를 돌보는 일을 이런 작은 일에도 행복감을 느껴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졸업을 앞두고 시골 본가에 내려온 나에게 문득 찾아온 불안감과 무력감을 해결하는 데에 정말 많은 도움을 준다. 성취는 별 거 아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을 실천하는 것부터였다.


내가 왜 시골에서도 바쁘고 재밌는지 이제 다들 알았을까?





P.S. 이번주 주말에 김장을 한다. 우리 집은 김장 많이 하기로 소문난 집이다. 벌써 무섭다.


2023.12.06   날씨 맑음     기록 : 악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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