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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이지만 나는 지독한 가성비충이다.
부모님은 나름 풍족하게 키워주신 편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성비가 좋은 걸 선호하고, 그러다 보니 여행에서도 가성비를 따지는 편이었다.
다만 여행에서의 가성비는 가격면의 가성비보다 시간의 가성비를 따지는 편이었는데, 기왕 갔으면 유명한 맛집과 관광지는 다 볼 수 있도록 동선을 짜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여행은 플랜 A와 플랜 A가 틀어졌을 때를 대비한 플랜 B, 그리고 그 계획별 예상 소요시간과 금액, 주소가 적힌 여행계획표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됐었다.
하지만 모든 계획이 그렇듯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계획대로 된다 한들 기대만큼 재밌지도 않았다.
애초에 사전조사를 하면서 찾아보는 자료조사에서 이미 한번 다녀온듯한 기분이 들었고, 여행자의 기분보다는 가이드의 기분이 되어 온전히 여행을 즐기지도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안 좋아하는 편이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충동적으로 다녀온 여행에서 알게 된 것이다.
큰 틀만 짜놓고 여행지에서 마음 가는 대로 하는 편을 좋아한다는 것을..
여기서 큰 틀은 항공편, 숙소, 렌터카처럼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들로 나는 내가 계획적인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무계획을 좋아했던 것이었다.
가성비를 좋아한다는 틀에 나를 넣어놓고 그 안에서만 움직이다 보니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번 백제 테마 여행에서 내가 한 계획이라고는 숙소 예약, 저녁 메뉴 생각하기, 오는 길에 성심당 들려서 살 빵 검색해 보기 정도였다.
예전이었으면 틈날 때마다 여행지를 검색해 봤을 테지만 이번에는 딱 한번 저녁 메뉴 선정을 위한 검색만 한두 번 했고, 결정 내린 뒤에는 아무런 검색을 하지 않고 그저 재밌겠다는 기대와 설렘만으로 기다림을 채웠다.
나의 이런 변화에 남편은 크게 환영했다.
남편은 애초에 나한테 맞추느라 억지로 맛집 1시간 줄 서기, 수학여행급 계획표 따라 여행하기에 동참했을 뿐이지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이벤트를 더 선호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는 취향, 취미, 입맛, 가치관이 매우 비슷한 편이었는데 (애초에 내가 남편에게 반하게 된 것도 비슷한 면이 많아서가 시작이었다.) 여행에서만큼은 참 안 맞다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여행 취향도 비슷할 줄이야..
아무튼 여행당일 우리는 알람 없이 느긋하게 깨어나 미리 고양이의 간식을 챙겨주고, 물그릇을 하나 더 놓아주고, 홈캠을 켜두고 가볍게 출발했다.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한 나머지 짐도 당일에 대충 챙겨 나와서 빠트린 것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침 챙겨 먹기였다.
원래 나는 아침을 안 먹는 편이지만, 여행을 하려면 아무래도 든든하게 삼시세끼 챙겨 먹는 게 좋지 아니한가.
빈속으로 차에 앉아있자니 금방 멀미가 나서 집에서 출발한 지 30분도 안 되는 곳에 위치한 휴게소에서 급하게 라면을 먹었다.
멀미로 메슥거리던 속에 얼큰한 라면이 들어가니 금방 컨디션이 회복되었고, 그제야 나는 오롯이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옆에서 헛구역질하는 나 때문에 걱정하던 남편의 여행도 그때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