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미팅을 위해 자주 성수동을 찾는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와 중심가에 들어설 때마다, 평일임에도 거리에 넘쳐나는 외국인 인파에 놀라곤 한다.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한국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다. 다들 세련된 옷차림에 손에는 화장품이나 먹거리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있다. 마치 뉴욕이나 홍콩의 번화가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낡은 건물들 사이로 올리브영의 랜드마크 매장과 디올의 컨셉 스토어가 시선을 끌고, 골목마다 팝업스토어와 브랜드 쇼룸, 감각적인 디저트 가게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힙한 식당이 즐비하고, 오래된 공장을 개조한 갤러리나 카페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성수동에 갈 때마다 ‘오늘은 어디서 밥 먹고, 커피 마실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오감이 지루할 틈이 없다.
물론 성수 이전에도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을 끌던 지역은 있었다. 강남, 홍대, 이태원 같은 동네들 말이다. 하지만 성수동은 이들의 매력 요소를 흡수하고 진화시켜, 훨씬 더 복합적이고 덜 정형화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예전에는 미국 또는 유럽에서나 경험할 수 있었던 세련된 도시 감각을, 이제는 서울 성수동에서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다니엘 핑크는 <새로운 미래가 온다>에서 국가의 경제 성장 초기에는 좌뇌적 사고, 즉 논리와 분석이 중요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 발전한 후에는 감성과 창의성, 즉 우뇌적 사고가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개발도상국 시절에는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 속에서 회계, 법률처럼 분석력과 계산력이 필요한 분야가 각광받는다. 생산성을 따지고, 효율을 극대화하며, 원가를 낮추는 방식의 좌뇌적 사고가 주류를 이룬다. 사람들은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좋은 대학과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논리적 추론 능력과 정답을 찾아내는 스킬을 훈련한다.
하지만 경제가 일정 수준 이상 성장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본적인 생존과 기능을 충족한 소비자들은 이제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 ‘무엇이 더 감각적인가’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다니엘 핑크는 이렇게 말한다.
좌뇌의 승리에 기반을 둔 이러한 풍요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바로 우뇌적 감수성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침없이 늘어난 부는 좀 더 아름답고 영적이고 감각적인 우뇌적 가치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제품이 ‘잘 작동하는가’보다 ‘얼마나 예쁘고 감각적인가’, ‘구매자의 감정을 건드리는가’,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저렴한 가격이나 기능적 완성도만으로는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없고, 경쟁력도 확보하기 어렵다.
풍요의 시대에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기능적인 면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시각적 혹은 정신적인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면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면할 수 없게 됐다. 너무나도 많은 대체상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 감정이입, 유희와 같은 소프트한 특성, 그 신비한 힘은 해당 제품을 차별화하는 주요한 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기능성 만으로는 더 이상 차별화가 어렵다. 하지만 감성, 디자인, 스토리텔링이 더해진 제품은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을 지니게 된다. 선진국의 소비자들은 더 이상 단순히 쓸모를 위해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그들이 소비하는 이유는 새로운 감각, 새로운 감정, 새로운 이야기를 경험하기 위해서다.
즉, 선진국에서는 높은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논리적 정답보다 감각적인 경험, 기능적 효율보다 미적 예술성이 중요해진다. 정답을 맞히는 능력보다 상상력과 유머, 공감력이 더욱 요구된다. 사회는 점점 좌뇌 중심에서 우뇌 중심으로 이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수동은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다. 원래 이곳은 제화업, 금속 가공, 인쇄소 등이 밀집한 전형적인 공장지대로, 기능성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좌뇌적’ 산업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성수동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과거 정미소와 창고였던 ‘대림창고’는 갤러리와 카페가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고, 공장의 골조를 그대로 살린 채 예술적 감각을 입힌 카페 ‘어니언’은 성수를 대표하는 힙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이외에도 과거 작업장과 창고였던 건물들이 감각적인 디저트 가게, 패션 쇼룸, 전시 공간, 팝업스토어 등으로 변모했다. 기능성과 효율을 우선하던 장소가 이제는 감성과 창의성, 디자인을 중심으로 재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일반적인 도시 재생의 차원을 넘는다. 성수동은 이제 IT 스타트업과 창작 산업의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게임 회사 크래프톤은 약 1조 7,000억 원을 들여 성수동 일대 부지를 매입하고, 신사옥을 포함한 대규모 복합문화·업무시설을 조성 중이다. 단순한 업무 공간이 아니라, 게임 개발 스튜디오, 브랜딩, 문화 체험 공간이 어우러진 수직 통합형 크리에이티브 클러스터를 구축할 예정이다.
즉, 성수동은 그저 낡은 공장을 멋진 공간으로 꾸민 동네가 아니다. 전통적인 좌뇌형 제조 산업의 터전이, 감성과 창의성을 중심으로 한 우뇌형 산업 생태계로 재편되는 중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뿐만 아니라, 공간이 담는 의미와 작동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전환되고 있다.
다니엘 핑크는 고유한 스토리를 가질 때 비로소 창의성이 발휘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스토리는 단순한 일화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하고, 느끼고, 해석하며 축적한 무형의 자산이다. 좌뇌적 시대에는 표준화와 통일성이 미덕이었다면, 우뇌적 시대에는 ‘다름’이 곧 경쟁력이다. 그리고 각자가 가진 고유한 서사와 감정의 결이 바로 창의성의 원천이 된다.
우리의 스토리는 곧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의 경험·사고·감정을 몇몇 압축적인 스토리로 집약해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우리 스스로에게 말한다. 언제나 그래왔다. 스토리는 풍요의 시대에 더욱 기세를 떨칠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됐다. 풍요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삶의 목적을 찾기 때문이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지난 80여 년 동안 산업화, 도시화, 세계화를 거치며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전쟁 후 폐허에서 출발해 청계천, 구로에는 산업단지가 들어섰고, 강남과 목동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생겨났다. 압구정과 가로수길에는 고급 소비문화가, 이태원과 경리단길에는 글로벌 감각이 더해졌으며, 을지로와 문래에서는 도시재생을 통해 낡은 공간이 감성적으로 재해석됐다. 홍대는 케이팝과 클럽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며 젊은 감각을 더했다.
이러한 도시의 흐름과 문화적 층위가 집약된 곳이 바로 성수동이다. 과거 공장과 창고가 남긴 산업화의 흔적 위에 예술과 패션, 커피와 디저트, 명품과 스트리트 감성이 중첩되어 있다. 벽돌 담벼락과 낡은 창틀 사이로 서울의 과거와 현재, 로컬과 글로벌이 함께 숨 쉬며, 골목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축적해온 기억과 감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그래서 성수는 쉽게 질리지 않는다. 갈 때마다 새로운 자극이 있고, 볼거리와 이야기가 끝없이 펼쳐진다.
이제는 외국인 관광객, 글로벌 브랜드, 패션 피플들이 모여들며, 흥미로운 ‘현재의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덧붙여지고 있다. 그 결과 성수동은 ‘살아 있는 이야기의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그렇게 축적된 스토리와 감각의 밀도는 성수동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로써 성수동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경쟁력 있는 도시 문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뇌적 사고를 통한 부가가치 창출은 도시재생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제는 브랜드와 산업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예컨대 ‘런던베이글뮤지엄’은 단순한 베이글 가게가 아니다. ‘미술관’이라는 콘셉트를 도입해 공간을 큐레이션하고, 베이글 하나하나를 전시품처럼 연출한다. ‘설빙’은 계절과 테마를 입힌 시즌 한정 메뉴를 통해, 익숙한 빙수에 새로운 감각과 이야기를 더한다. 단순한 먹거리도 디자인과 서사를 더하면 전혀 다른 감각의 상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뷰티 산업에서도 두드러진다. 과거에는 미백, 주름 개선처럼 기능 중심의 좌뇌적 메시지가 주요 경쟁력이었다면, 이제는 감성과 라이프스타일이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결정한다. ‘탬버린즈’는 향과 텍스처, 매장 디자인까지 예술적으로 설계해 단순한 화장품이 아닌 ‘오감의 경험’을 제공한다. ‘라카’는 성별 구분을 허물고, “뷰티는 모두의 것”이라는 철학을 통해 젠더 감수성과 정서적 공감을 끌어낸다. 제품 기능은 이제 기본값일 뿐이고, 그 위에 얹힌 느낌과 경험이 차별화의 본질이 된다.
이처럼 우뇌적 가치는 소비자에게 감각적 만족과 정서적 울림을 제공하면서, 브랜드에는 실질적인 고부가가치를 안겨준다. 동일한 품질의 제품이라도 감성적 스토리와 미적 표현이 더해지면, 전혀 다른 반응과 가격을 이끌어낼 수 있다. 오늘날의 소비자는 ‘잘 만든 제품’이 아니라, ‘잘 설계된 경험’을 구매한다.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한국의 도시는 해외에 비해 별다른 매력이 없었다. 뉴욕, 홍콩, 파리처럼 도시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곳들과 비교하면, 네모반듯한 아파트 단지와 요란한 간판이 늘어선 거리를 가진 서울은 그저 실용적인 공간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는 확연히 달라졌다. 성수동 같은 동네는 세계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감각과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외국인 방문객들에게 신선함과 재미, 영감을 주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실 한국은 오랜 시간 농경 중심의 사회였고, 본격적인 도시 문화의 역사는 길지 않다. 수백 년간 근대 도시 문화를 발전시켜온 서구의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뒤처져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지난 100년 가까이 다양한 양식을 받아들이고, 직접 체험하고, 스스로 재해석하며 한국만의 도시감성과 문화를 만들어왔다. 그 결과는 패션과 디자인, 식문화와 공간 등 곳곳에서 고유한 색채와 창의성으로 드러난다.
만약 선진국의 기준이 단순한 소득 수준을 넘어, 생활양식과 도시의 매력, 창의적 감각까지 포함한다면, 한국은 이미 그 반열에 올라섰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좌뇌적 사고가 아닌, 우뇌적 감각을 바탕으로 누구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 성수동은 그러한 전환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기에, 앞으로 또 어떤 흥미로운 도시적 진화를 만들어낼지 기대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