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유 Aug 21. 2024

오늘도 태양은 뜨겁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관한 소고

  무더운 여름의 절정을 지나 어느덧 가을의 초입으로 달려가고 있다. 아마 글을 올릴 때쯤이면 처서를 목전에 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열기와 수분은 좀처럼 가실 생각을 않는다. 가끔은 공상과학 시대처럼 지구를 모조리 실내로 만들어 에어컨을 가동하고 싶다는 상상까지 하게 된다. 사실 현대 기술로 나의 일상 반경을 냉장고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미 우리는 시원한 공기가 가득한 버스에서 쾌적함을 유지하는 백화점 안으로, 다시 내 몸속에 직접 차가운 물질을 넣어줄 카페로, 그것을 역재생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불연속적 냉장고'를 어느 정도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불연속 사이의 간극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으며, 분명 보이지 않아도 태양은 강력한 에너지를 내뿜고 있다. 즉, 태양은 항상 강렬하고 뜨겁다. 그러한 태양의 파장을 마주하고 있다 보면, 홧김에 누군가를 총으로 쏠 수 있을 듯한 획기적인 결정을 상상하기도 한다.


태양
"태양의 붉은 폭발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모래 위에서 바다는 작은 물결들이 되어 부서지며 급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바위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쏟아지는 태양의 열기에 이마가 팽창하는 느낌이었다. 그 모든 열기가 머리 위에서 나를 내리누르면서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뜨거운 태양의 엄청난 숨결을 얼굴에 느낄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바지 주머니 속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태양과 태양이 쏟아붓는 그 캄캄한 취기를 이겨 내려고 전신을 긴장시켰다. 모래, 흰 조개껍질, 유리 조각에서 빛의 칼날이 솟아날 때마다 내 턱뼈가 움찔움찔했다. 나는 한참을 걸었다."


  당연히 이 구절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제1부의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뫼르소의 더위에 관한 묘사이다. 물론 더위는 각기 느끼는 정도의 차이를 지니지만, 절정에 이른 태양의 내리쬠으로 인한 뫼르소의 억압된 심정에는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어찌 반항할 수도 없고, 그저 감내해야만 한다. 카뮈의 비유처럼 태양은 보이지 않지만 '나를 누르고 있으며, 나는 단지 주먹을 불끈 쥘 뿐'이다. 그러한 억압의 지속은 어떻게 보면 반드시 어느 형태로든 분출로 이어진다. 그 강도 역시 다를 수 있다. 그것이 비단 '이세계로의 타인 추방'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사실 태양이 주는 일종의 불쾌함은 항시 일상에서 느끼고 있다. 이처럼 생명 잉태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태양은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나의 통제를 받지 않는단 점에서 최소한 주체에게는 일부 부정적이다. 현실에서 그 태양의 강렬함을 거슬려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마는, 한 번 심기가 건드려진 사람은 그것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의 결과로서 내 몸속에 있는 응어리를 화산처럼 폭발시키듯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칼을 뽑더니 태양 빛 속에서 나를 향해 쳐들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되었고, 번적하는 긴 칼날 같은 것이 되어 내 이마를 쑤셨다. ... 나는 다만 이마 위에서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 그리고 내 앞의 칼에서 여전히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그 불타는 칼을 내 속눈썹을 쥐어뜯고 고통스러운 두 눈을 후벼 팠다. ... 나의 전 존재가 팽팽하게 긴장했고 나는 손으로 권총을 꽉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손잡이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날카롭고도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흔들어 털었다."


알베르 카뮈

  1960년 1월 4일 알베르 카뮈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생전 그가 남긴 저작의 위대함은 노벨문학상으로 대변된다. <이방인> <시지프 신화> <페스트>로 이어지는 부조리 3부작은 흔히 철학계와 문학계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그 시작을 알리는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가 겪는 삶의 부조리를 바탕으로 한다. 카뮈에 대한 해석에 기반할 때, 부조리란 인생 그 자체임과 동시에 가장 본질적인 관념이다. <이방인>에서 카뮈가 보여주고자 하는 부조리는 제2부의 재판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법부의 심문과 목사의 설교, 변호사의 충고는 한없이 부조리하다. 이러한 해석은 <이방인>을 연극으로 각색해 보고자 하는 어떤 독자의 편지에 대한 카뮈의 답장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정면으로 공격받고 있는 대상은 윤리가 아니라 재판의 세계입니다. 재판의 세계란 부르주아이기도 하고 나치기도 하고 공산주의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시대의 모든 암들입니다. 뫼르소로 말하자면 그에게는 긍정적인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거부의 자세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말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뫼르소는 판사들이나 사회의 법칙이나 판에 박힌 감정들의 편이 아닙니다. 그는 햇볕이 내리쬐는 곳의 돌이나 바람이나 바다처럼(이런 것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존재합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 공감하는 <이방인>의 부조리는 태양이다. 마지막에 카뮈가 언급하고 있듯이 뫼르소는 햇볕을 마주한 무언가이다. 뫼르소가 여타 자연물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라고 했을 때, 그는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은 자이다. 동시에  태양의 부조리함에 결국 방아쇠를 당겨버린 그는 지극히 반항적이다. 그가 아랍인을 총으로 쐈을 때, 그는 태양을 털어버렸다고 얘기한다. 또한, 카뮈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방인>이 공격하는 대상은 재판이지 윤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재판으로 들어가기 이전의 모든 것들은 윤리적 공격을 받을 수 없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은 것에 대해 주위 사람들은 비난을 가하며, 그 사실은 재판에서 어이없게도 유죄를 확정 짓는 근거로 활용된다. '비사회적'이란 말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이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재판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부조리에 대항하는데 이는 태양에 대항하는 구조와 동일하다. 총을 쏘는 폭발력과 비교한다면 목사에게 퍼붓는 뫼르소의 연설이 비슷할 것이다. 결국 모든 사회적 부조리는 태양과 같다. 그리고 이 태양은 지극히 '자연'적이다.


조커

  <이방인> 독자는 한 지점에서 갈라질 것이다. 바로 뫼르소가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총기의 화력으로 이용한 지점이다. 누군가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전자는 사회적 인간이고, 후자는 비사회적 인간일 것이다. 여기에는 윤리의 선호가 작용하지 않고, 그저 '내가 그것을 보고 어떻게 반응했냐'만 작용한다. 후자가 비사회적 반응이라는 결론은 카뮈의 의도와 맞아떨어질 것이며, 실제 내 주위에 그 쾌감을 고백했을 때 청자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부조리에 대한 격정적 대항을 마주한 상반된 두 반응은 서로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기보다는 그 부조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대처하고 있느냐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문학이 사회를 앞질러가는 혹은 사회의 이면을 지적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면, 결국 <이방인>이 독자로 하여금 일으키고 싶은 반응은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결코 이 글은 살인에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지닌 사람으로 오해를 받아서 쓰인 글이 아니며, 무더운 더위를 제공하는 원망스러운 자연에 의해 자연스레 마주한 사유로 쓰인 것이다. 또한, 그저 누군가 휴대용 에어컨을 개발해 줬으면 싶은 마음뿐이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김화영 역, 민음사, 2020.


작가의 이전글 자유 갈망과 주체 상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