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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수 Dec 29. 2021

수요 수필 - 서쪽 해안에서 피는 백합

 새벽에 볼 일이 급해 화장실에 들어섰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람 키만 한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잠에서 덜 깬 나는 이 집에 사는 오래된 붙박이 정령이 나타났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시커멓고 기다란 정체불명의 그것이 가슴 장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집 베란다에는 가슴 장화 두 켤레가 있다. 가슴 장화는 멜빵바지 모양으로 생긴 장화이며, 키 165cm 정도의 사람이 입으면 가슴팍까지 온다. 뱃사람들이나 갖고 있을 법한 낯선 물건이지만 뻘을 좋아해서 조개 캐기가 취미인 부모님을 둔 나에게는 익숙하다.

  가슴 장화를 챙겨 대부도에 가면 바다에서만 피는 신비한 꽃을 볼 수 있다. 검은 진흙에서 캐낸 진주처럼 빛나는 조개. 이름에서 우아한 향이 나는 '백합'이다. 백합을 캐기 위해 가족들은 동서남북으로 흩어진다. 저만치 간 엄마가 백합이 피었다며 허리를 구부린다. 무분별한 어획을 줄이기 위해 정해둔 갯벌체험장에서만 조금씩 할 수 있지만, 집에 갈 때쯤 되면 작은 플라스틱 양동이가 제법 무거워진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짠 기가 느껴졌다.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면 여기저기 사람들에게서 들리는 백합이라는 단어 덕분에 꽃밭에 온 기분이다. 나는 검은 꽃밭에 앉아 엄마의 뒷모습을 본다. 굽은 등 위로 세월이 주저앉은 듯해서 왠지 모르게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다.

  사는 게 빚을 갚는 일처럼 고돼서 꽃집에 갈 여유는 사치라 생각했던 사람. 어버이날 달아 드리는 카네이션의 무게가 천금 만금 같았을 사람. 꽃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 백합처럼 피어있다. 붉게 타오르는 낙조가 그녀의 머리 위로 물든다. 나는 잠시 양동이에 반쯤 찬 조개들을 꺼내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만큼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 가슴 장화를 깨끗이 닦은 후 베란다에 세워놓았다.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서 빈 백합 껍데기가 나왔다. 해풍과 파도로 무늬가 생긴 겉과 달리 반질반질하게 하얀 속을 보고 있자니 잠이 든 엄마의 옛날 사진이 떠오른다. 사진 속의 엄마는 어느 건물 앞에서 밤색 모직 원피스에 앞코가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다. 칠흑 같은 단발머리와 대비되는 얼굴에 뽀얀 미소가 걸려있다. 이 맵시 좋은 아가씨는 누구야? 하고 장난치듯 물었을 때, 엄마는 "나였지."라고 대답했다. 아마 세상 모든 딸은 그 말에 담긴 과거형이 애달파서 잠시 상념에 젖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조개껍데기를 깨끗이 씻어 유리병 안에 담아둔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빈 백합 껍데기였나,

1960년생 여자의 기나긴 세월이었나.

쏜 살처럼 흘러간 것은 그녀의 꿈이었을까,

조개를 품은 낮은 파도였을까.

유리병 입구에서 바닷바람 소리가 난다.


어쩐지 서쪽에서 불어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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