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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수 Nov 24. 2021

수요 수필 - 버드 나무 아래 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안 되는 풍경이 있다.

아이들이 많아서 17반까지 있고 심지어 오전반/오후반으로 나뉘어

조회를 할 때도 병렬로 서야 했던 1990년대.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나는 주말이면 앞집 영희를 따라서 그 집 가족이 다니던 교회에 쫓아다녔다.

영희, 영희 동생 철희, 영희네 아주머니며 아저씨며 심지어 기르던 개까지.

태생부터 정이 넘치고 살가웠던 그 집 식구들은 앞집의 말주변 없이 빼빼 마른 아이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주말을 보내게 될까 봐 걱정이 앞섰나 보다.  


 이 가족은 예배가 끝나도 곧장 집으로 오는 법이 없었고

늘 큰할머니 댁, 이모네 집, 누구네 삼촌네 집으로 2차를 갔다.

아 물론 나도 함께였다. 그렇게 얼결에 딸려간 앞집의 친척집에서 대가족과 함께 보리밥에 된장국도 먹고 어떤 날은 뜨거운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넣고 비빈 점심을 대접받았다.  

 

 머리가 하얘서 함박눈을 맞은 것처럼 보였던 치매에 걸린 할머니께서

영희 옆에 앉은 나를 가리키며 근데 쟈는 누구여? 하고 물어보시면

영희는 '제 친구 정은이요.' 하고 영희 동생은 '영희 언니 친구 정은언니요.'하고

영희네 아주머니나 아저씨는 '영희 친구 정은이요.' 하고 영희 이모는 '영희 앞집 사는 애야 엄마.'하고 대답했다.

 졸지에 떠오르는 신예처럼 밥상머리 위의 화두가 된 나는 쑥스러움에 고개를 숙이기 일쑤였고,

미간을 찡그리고 나를 빤히 보던 할머니께선 '그게 다 무슨 말이여? 왜 다들 얘만 쳐다 보는겨?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려. 얼른 먹어라.' 하며 내게 누룽지를 밀어주셨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영희 자매와 나는 마당에 달려 나가 버드나무에 매달린 그네를 탔다.

처음엔 그 나무가 귀신이 머리를 풀어놓은 것처럼 보여서 좀 섬뜩했는데,

자꾸 보다 보니 그마저도 신비롭고 재밌어졌다.

 볕이 좋은 날에 삐걱거리는 그네를 타다 위를 올려다보면,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잎 사이로 빛의 커튼이 부드럽게 펄럭이곤 했다.



꼭 이렇게 생긴 나무였다.  


영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처럼 버드나무를 보면 그때 우리가 타던 낡은 그네를 떠올릴까?  

그네의 움직임에 따라 넘실거리던, 눈앞의 풍경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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