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활수 Apr 30. 2022

단편 소설 2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수필같은 연애 이야기.

참으로 오랜만의 데이트였다. 그는 정성 들여 면도를 하고 옷장을 열었다. 입을 옷이 없어 한동안 서랍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올리브색 스웨터를 꺼내 입었다. 거울 앞에서 대보니 그나마 제일 깔끔해 보였다. 사실 그는 어젯밤 들른 쇼핑몰에서 셔츠라도 살까 하다가 결국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에서 ‘무슨 호들갑’이냐며 경종을 울려댔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몇 년간 연애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학자금 대출, 아버지 용돈, 생활비에 치이다 보니 연애는 사치라 생각했다. 학부시절부터 늘 그랬다. 언제나 쫓기듯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걸음밖에 할 수 없도록, 누군가 그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둔 것 같은 삶이 계속됐다. 그 무게에 허리가 꺾여 주저앉기를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도 없는 그의 시야 안에 한 여자가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만큼이나 말수가 적었다. 그와 입사동기였지만 이렇다 할 왕래가 없어서 가볍게 목례 정도만 하는 사이였다. 아, 엄청난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녀도‘박 대리’라는 것. 팀은 달랐지만 위아래 사이에 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처지는 비슷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회식 자리에서 상사와 후배를 동시에 챙기느라 소리 없이 바쁜 그녀를 보면 묘한 동지애마저 느껴졌다. 언젠가 신입 하나가 술에 취해 키우는 고양이가 늙어가는 것이 슬프다고 했을 때, 그녀는 마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양이를 입양 보낸 전 주인처럼 코를 훌쩍이며 울었다. 다 큰 여자가 고양이 이야기에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뭐랄까, 그에게는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고 생소했다. 그날 그녀의 손에 티슈를 쥐어준 그의 마음은 더 이상 같은 ‘박 대리’로서의 ‘동지애’가 아니었다. 그 변화를 감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가 고백을 해왔다.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불가항력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마음이 그녀로부터 최대한 멀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딱히 신을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럴 땐 종교의 힘이라도 빌리는 것이 최선이니까.


 

 그러나 어디 한 번이라도 신이 그에게 다정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가 그녀에게서 멀어지려 할수록 그녀는 더욱 가까워졌다. 애초에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사는 게 퍽퍽했다고는 하지만 어렸을 땐 그도 연애를 여러 번 했었다. 서로 마주칠 때면 그녀가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 우물쭈물한다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아니, 어떤 남자라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마주치기만 하면 발그레해지는 뺨이나 숨길 수 없다는 듯 곁눈질로 그를 훔쳐보는 시선. 사랑스러웠다. 동시에 바보 같았다. 왜 하필 이렇게 팍팍한 남자를 마음에 두었느냐고, 다그치고 싶기도 했다.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여유롭고 자상한 남자의 사랑을 받을만한데 사랑스럽다는 한마디조차 힘들어하는 남자는 당신 인생에서 제외하라고. 주제넘지만 매정하게 조언이라도 해줘야 하나 싶었다. 


 

 자연스레 그녀의 뒷모습을 찾는 일이 많아지던 어느 날, 탕비실에서 마주치자 그녀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전에 없던 반질반질한 빨간 사과 여섯 개가 옹기종기 쌓여있었다. 아마 며칠 전 함께 간 카페에서 사과를 좋아한다고 했던 그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그녀의 부모님이 시골에서 작은 과수원을 한다는 이야길 듣고 과일을 잘 먹지 않지만 유일하게 사과는 먹는다고 말했었는데, 때를 놓치지 않고 눈동자를 반짝이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는 사과를 한 개 꺼내 흐르는 물에 씻고는 베어 물었다. 아삭, 하고 소리를 내며 입 안 가득 향이 퍼져나갔다. 달았다. 빌어먹게 달았다. 

 그는 이 사과와 함께 자랐을 한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부모님을 도와 사다리 밑에서 사과를 주웠을 여자. 그러다가 사과에서 떨어진 벌레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을 여자. 태풍이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면 저보다 사과를 더 걱정했을 여자. 못생긴 사과는 다 자기 몫이었다며, 밥보다 사과를 더 많이 먹었다는 여자. 그래서 사과같이 소담하고 향기로운 여자. 단단히 걸어 잠근 그의 문을 열게 하고, 자꾸 사랑이란 걸 해보고 싶게 만드는 여자. 


 퇴근 후 쏟아지는 폭우를 걱정스레 올려다보는 그녀를 보자마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갓길에 차를 대고 빗속을 뛰어 그녀가 서있는 로비로 가는 내내, 이상하게도 세상의 온 바람이 그의 등 뒤를 밀어주는 것 같았다.  

 그는 손목시계를 차며 집을 나섰다. 그녀의 집 앞으로 데리러 갈 계획이었다. 주차장으로 가는 사이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그녀가 보낸 날이 참 좋다는 메시지였다. 어쩌면 신은 그의 예상을 뒤엎을 만큼 꽤 다정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주 오랜만에, 길에 잠시 멈춰 선 채로.  

작가의 이전글 단편 소설 1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