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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수 Nov 21. 2021

일요 수필 - 바다에 세워진 촛대

   어마어마한 크기의 촛대가 있는 곳이라 했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들뜬 목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그 촛대가 무엇이기에 깐깐하기로 소문난 얼굴에 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나는 엄마를 기쁘게 한 큰 '촛대'를 확인하기 위해 강릉행 버스에 올랐다.


 우리에게는 돈도, 차도 없었다. 다 늙어서 젊은 애들처럼 여행하려니 재미있네. 엄마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고속버스에서 마을버스, 도보로 이어지는 여행에 단 한 번도 주저앉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에 비해 나는 죽을 맛이었다. 택시를 타자고 조를 때마다 불량식품을 사달라고 떼를 쓰는 10살짜리 애가 된 기분이었지만, 운동부족인 저질체력에게 4박 5일의 무전여행은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어시장을 들러 물회로 배를 채운 뒤 등산을 하고, 버스를 여러 대 갈아탔다. 그땐 스마트폰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라 지름길이나 맛집, 숙박 등을 검색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서서히 심 여사표 여행 방식에 물들어갔다. 청춘은 내가 아니라 엄마가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왜 아직도 청춘이야? 몰라. 딸이 청춘이라 나도 그런가 보지. 매운탕이 보글보글 끓고 바닷바람은 두 여자를 어루만지길 반복했다.


  며칠 뒤, 강원도의 여기저기로 흘러 다니던 엄마와 나는 추암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하늘 높이 달이 떠 있었기 때문에 촛대바위는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낡은 창문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과 파도 소리에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민박집에서 소담한 아침을 먹고 촛대바위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우리는 맑고 강한 볕 아래 발가벗겨진 마음을 나누며 그동안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엄마의 손을 잡고 가만히 주억거리다가 촛대바위가 보여 더 꼭 쥐었다. 떠오른 해를 꼭대기에 얹고 서있는 그 바위는 뭐랄까, '촛불이 켜진 촛대'같이 보였다.

     

 우리는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에 세워진 큰 촛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물 잔에 담긴 촛대에 촛불이 켜진 것 같지 않냐는 나의 말에 엄마는 그렇다고 웃음을 지었다. 촛불의 미학이라 함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흔들림'을 마주 볼 수 있는 힘을 만드는 것.


 반평생을 스스로 타는 초가 되어 살아온 여자와,  그녀에게서 흔들리며 떨어지는 촛농이 서글펐던 젊은 딸. 나는 그저 높고 각이 진 바위에 '촛대바위'라는 이름을 붙인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눈이 부실 때까지 바라보는 것으로 보답을 대신했다.


 여행이 끝난 후, 엄마의 휴대폰 배경화면은 촛대바위로 바뀌었다. 우리는 마음이 드러눕는 날마다 그날처럼 흔들리며 타오르는 촛불과 촛대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우리를 위해 켜 둔 불빛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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