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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Mar 28. 2024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12


여덟 번째 우리 집


여덟 번째 우리 집으로 이사를 올 때는, 음지에서 양지로 나가는 기분, 긴 터널을 인내심 있게 참고 견뎌 세상 밖으로 나온 기분과 다름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그 동네는 훨씬 밝아 보였고 잘 정돈되어 보였으며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밝고 건강해 보였다. 고양시라는 낯선 동네였지만 모든 게 쾌적한 곳으로 보였다.


회사에서 받을 수 있는 대출을 모두 사용하여 보증금을 내고 월 35만 원의 이층 집에 살게 되었다. 주변 환경이나 생활 여건이 전에 살던 집과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집 안도 넓고 깨끗했으며 수세식 화장실에 햇볕도 잘 들어왔다. 그 당시 나에겐 꿈에 나올 만한 집이었다. 행복했고 살 맛이 났다.


동생 방 내 방에 침대 하나씩을 들이고 기본적인 가전도 구입하고 식기나 수저까지 모조리 새로 사들였다. 월세까지 내야 하는 마당에 부담스럽긴 했으나 상관없었다. 당장에 회사를 잘릴 것도 아니고, 설사 잘릴 때 잘리더라도 적어도 이때는 이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었다.


나는 회사원으로서 신입의 티를 조금씩 벗어가고 있었고 후배들도 계속 들어왔다. 술을 어느 정도 먹었던 탓에 선배들하고도 친했고 이런저런 위기와 기회들이 오고 가며 지지고 볶고 하는 회사생활에 물들어 갔다. 덕분에 많은 사회화를 이룰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나는 언제든 잘릴지도 모른다,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 이 생활도 얼마 못할지도 모른다 등의 불길한 생각이 솟아올랐고, 그때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동생은 직장을 다니면서 공짜로 오빠 뒷바라지를 해왔는데, 이제 나는 공식적으로 집안일을 해주는 알바로 채용(?) 하기로 했다. 또한 오빠로서 (여동생의 장래에) 방해만 되어 왔던 것이 미안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는 충분치 않지만 조금이라도 동생의 앞날을 대비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은 이제는 대학도 원하지 않았고 많은 부분 꿈도 접은 듯했다. 안타까웠다. 그나마 코디네이터를 한번 해보고 싶다 해서 그에 관한 학원을 보내 준 게 다였다.

그렇게 남매의 삶은 덜컹덜컹거리긴 했어도 나름 삶을 꾸려 가고 있었다.

이때의 삶은 어찌 보면 그 동안 지친 삶을 달래는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도통 여유가 없이 치열한 삶에서 드디어 여유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고 앞날이 희망이 있을 거라는 느낌을 현실적으로 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니 회사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밥벌이. 그야말로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전제 조건이라 하겠다. 나는 그것을 위해 그렇게 애를 써왔고 말이다. 이젠 그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잠시 숨을 돌리고 휴식과 여유를 즐길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나의 재정 상황은 마이너스 인생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출 원금과 이자가 매달 빠져나가고 있었고 월세도 나가니 도저히 개선이 되질 않았다. 딱 하나, 젊다는 거 믿고 일단 현재를 즐긴 셈이다.

회사에서의 치열함은 자꾸자꾸 커져갔다. 뭔가를 해결하면 새로운 문제가 생겼고 그걸 또 해결하면 더 큰 미션이 자꾸만 자꾸만 몰려왔다. 포기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는데.. 그걸 또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 내고 보니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사람 간의 적절한 합의. 감정의 조절과 인내. 불합리함에 대한 적절한 어필. 배려의 장점과 단점. 나의 단점과 장점.

마이너스일지언정 월급은 계속해서 들어왔고, 밑 빠진 독에 물 붙기지만 그래도 살아는 있지 않냐며 계속해서 달리고 달려 나아갔다. 나는 점점 중견 사원이 되어 갔고 회사원이라는 위치가 아주 익숙해졌다.


그래도 어쩌면 이런 집에서 사는 것이 사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딱딱한 바닥에서 살면서 침대 생활을 하는 것을 로망으로 생각했는데 그렇게 살고 있었다. 수세식 화장실에서 살 날을 그리며 살아왔는데 그런 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말이다. 또 원하면 언제든 서점에서 책을 사들일 수 있는 처지였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깨끗하게 관리된 집에서 산다는 이 행복감은 내가 사치를 의심할 만큼 너무도 좋은 생활이었다.

주말에는 산에 가는 대신 동네 비디오방에서 비디오를 빌려와 맥주 한 잔 하며 여유로운 삶을 즐겼고 걸어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쇼핑몰에서 식료품과 옷을 사고 식사를 즐겼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던 남부럽지 않은 삶 같았다.

2002년 월드컵으로 나라가 온통 축제분위기였을 때, 집에서 맥주를 먹으며 우리 집과 축구를 즐겼던 기억은 아주 행복했던 단편의 기억이다.


이 모든 게 따지고 보면 회사 덕이었다. 길거리에 나돌아 다니며 빌어먹고 살 뻔하던 나를 받아준 회사 덕이었다. 전공도 따지지 않고 학점도 따지지 않았던 도량이 큰 우리의 회사 덕이었다.

인생에서 아무리 멋진 취미를 갖고 아무리 멋진 사고방식을 갖고 아무리 멋진 예의범절을 갖췄다 해도 그게 밥벌이를 못하는 상태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외모가 출중하던 몸관리를 잘하고 건강하던 내가 스스로 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명체라는 존재는, 최소한 먹을 것을 섭취해서 에너지를 얻어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고 생각도 바로 세워 살 수 있고 근육도 만들어 취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걸 또 스스로 해야 떳떳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밥벌이를 못하는 삶은 허상이라는 것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회사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내가 그렇게 힘들게 회사에 들어가 정식 직원이 되었을 때, 보험회사 들어갔다고 엄마에게 혼났다는 얘기라든가, 다른 회사 떨어져서 마지못해 왔다든가, 다른 꿈을 위해 그저 어쩔 수 없이 잠시 돈을 벌려고 들렀다는 식의 말을 들을 때는 힘이 빠지기도 했지만, 나는 전혀 내가 다니는 회사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너무 고마운 회사였고 너무 좋은 회사였다. 회사가 나를 버리기 전에는 나는 전혀 떠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입사 전후로 주변에서 ‘저렇게 산 타던 친구는 금방 퇴사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부장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더욱 열심히 하려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나는 그 부장님 보다  훨씬 오래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입사 이후 나는 회사일을 즐기고 있었고 행복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시험에 들게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나 역시 뭐든지 하겠다는 각오가 보였는지 주변에서 궂은일이나 귀찮은 일들을 나에게 미뤘고 나는 그걸로 점점 더 불안해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너무 저자세였나 싶은 그런 기분의 영향 탓이리라. 그러면서 초심은 점점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어디도 갈 데가 없었다. 여기서 해결해야 했다. 내가 산악부에서 버틴 이유도 그러했지만, 한 곳에서 적응 못해 다른 곳으로 떠나면 똑같은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고, 마음만 불안정해질 것이란 생각은 여전했다. 더구나 훌쩍 떠나버리면 후회스러운 일을 개선할 기회가 아예 없어지는 것이기에 그 헛헛함과 회한을 도무지 견디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고 극복하는 건 피할 수 없는, 그냥 삶 자체가 그거인,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해야 할 그런 일이었다. 그땐 정확히 몰랐지만, 나는 뭔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그냥 버티고 고민하고 생각을 고쳐먹고 하면서  꾸역꾸역 문제와 갈등을 해결, 아니 견뎌 나갔다.

참으로 불안한 삶이었고 미숙한 사회인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편안한 침대에 누워 나의 맘은 온통 회사 일과 생활로 편치 못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제 마냥 행복하고 즐겁던 신입사원 시절은 지난 것이다. 아직 젊고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면서도 불안한 현재와 더 불안할지도 모르는 미래를 생각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는 미생의 그리고 미완성의 사회인이 그 깨끗하고 쾌적한 집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악필, 202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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