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악필 Jun 01. 2024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15

열한 번째 우리 집


나의 열한 번째 우리 집은 무려 신혼집이었다. 나는 결혼하기 한 달 반쯤 전에 이사를 했고 결혼식까지 거기서 혼자 살았다. 여동생은 전에 살던 동네 근방에 원룸을 하나 잡아 주고.

신혼집에 들어올 가구 등을 감안하여 거의 모든 짐은 동생을 주거나 버렸기 때문에 이삿짐은 단출했다. 이사 같지 않은 이사를 했고 그 후로 나랑 여자친구랑 다니며 부지런히 질러댄 덕에 오래지 않아 가구와 살림살이 등이 들어섰다.

오래된 아파트여서 엘리베이터도 집도 많이 낡아 있었다. 맘에 들진 않았지만, 뭔 상관인가, 결혼을 한다는데.

내가 회사에 갔다  퇴근을 하면 집은 너무도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먹을 것도 준비되어 있었다. 우렁각시가 왔다 간 것처럼. 예비 장모님은 거의 매일같이 딸의 신혼집을 정비해 주셨다.

처음 장인 장모님을 인사를 드릴 때 너무 긴장해서 손이 덜덜 떨려 차도 못 마셨던 게 얼마 전인데, 이젠 두런두런 말도 잘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 인사드리고 며칠 후 집 계약을 위해 다시 처갓집을 갔을 때, 딱 한 번 본 예비 사위에게 삼계탕 한 그릇을 차려 주셨던 장모님이다. 너무 맛있게 먹었고 그 먹는 모습이 맘에 드셨는지 그 후로도 음식을 꼬박꼬박 챙겨주셨다.

또 나는,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은 맘을 갖고 하루하루 결혼식을 기다리며 지냈다.


반면 회사 생활은 일도 많고 일도 잘 안 풀리고 괴롭히는 사람도 있고 힘들었다. 신혼여행지를 정하기 위해 여행사를 갔는데도 머리는 온통 일 생각뿐이었다. 아, 정말 인생에 한 번뿐인 신혼여행을 즐거움만 가득한 채 갈 순 없는 걸까.

자꾸자꾸 결혼준비에 몸과 맘을 쓰려고 노력하며 고통스러운 일들을 잊으려 애썼다.

저녁마다 예비 신부는 본인 집 앞의 신혼집에 와 밥도 같이 먹고 티브이도 같이 보며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나서 집에 갔다. 여태껏 한 번도 자기 방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그 예비 신부는 결혼해서 생긴 집이 훨씬 더 좋았음에 틀림없다.


하여튼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동화나 소설에서 행복한 결말을 말할 때 나오는 그 결혼을 나는 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결혼은 누구나 큰 이벤트이고 전환기가 되는 것이겠지만 나의 경우는 좀 더 특별했다고 봐야겠다.

나와 신부가 주인공이고 그 주인공을 보기 위해 시골에서 버스를 대절해 많은 사람들이 올라왔고 친가 외가에서 빠짐없이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 주러 왔다. 그것이 7월 말의 휴가 시즌이었음에도 회사 사람들과 친구들은 ‘걔가 진짜 결혼하는 거 맞아? 확인해 봐야겠는데?’하는 마음이었는지 많이들 참석해 주셨다. 장녀로서 개혼이었던 신부 측도 마찬가지.

아버지 형제 중 유일하게 시골에 살았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중 유일하게 시골에 살았던 어머니. 그 사이에서 난 나와 동생은 알게 모르게 친가 외가 쪽 친척을 동경도 하고 신세도 지며 살아왔다. 일종의 컴플렉스라고 해야 할까, 내가 결혼한다는 거 자체가 현실적이지가 않았다. 결혼엔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던 나를 걱정한 건 부모님 뿐이 아니었다. 같이 살던 동생이 우선 그랬고 아버지 주변의 동네 어르신들이 그랬으며, 회사의 상사들 조차 우려를 표하기도 했었다. 그런 내가 결혼을 하는 것이었으니 특별함에 의미를 좀 더 부여해도 될 것이다.

나의 결혼은 산에 다니던 선배들에게도 큰 걱정거리 중 하나였다. 같이 산에 가서 어린 나이에 다치고 왔으니 앞날에 대한 걱정은 부모 못지않았다고 할 것이다. 역시나 많은 분들이 참석해 그 신기한 현장을 직관하러 왔다. 마침 또 주례 선생님도 산악회 선배님이었으니 그 의미는 더했다.


내가 생각하는 결혼식의 백미는 부모님 인사였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넙죽 엎드려 절을 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세상을 자식 하나 보고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부모님의 고생을 알면서도 나는 세상에 내 자리를 찾으려고 그저 앞만 보고 살아왔다. 부모님은 이제 허리도 고부라지고 머리도 하얗게 변해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부모의 희생을 먹고 자란 이기적인 자식이었다. 나는 위기의 순간을 꾹 참고 어쨌든 결혼식을 마무리했다.


신혼여행을 갔다 오고 우린 부부가 되어 드디어 합법적으로(?) 같이 살게 되었다. 오래된 아파트라는 첫인상과는 달리 살만했고 신혼이라는 신세계이다 보니 다른 흠들은 보이지가 않았다. 특히 처갓집과 가까운 것은 은총이라고 해야 할 만큼 너무도 좋았다. 이것은 나중에 아들이 태어나고서는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한편으론 결혼을 하고 나니 마치 세상의 모든 미션을 완수하기라도 한 양 긴장이 풀어져 만취하여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너무 만취해서 집도 제대로 찾아오지 못하는 날도 있었으니 신부에겐 한숨이 절로 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토요일 아침 숙취로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출근을 하는 아내는 ‘앞으로 이러면 곤란해요’라는 단호한 한 마디를 했고 한 동안 무서움을 느끼며 조심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근본적 해결은 안 되었다.


그러다 2세 계획을 세우면서 자제를 했고 마침내 아내는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설렘은 잠시. 유산을 하게 되었다. 세상을 너무도 바르고 착실하게 살아온 아내에게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착실하지 못하고 음주로 몸을 함부로 굴린 나의 탓이었다.


그러다 다시 몸을 추슬러 두 번째 임신. 그게 지금의 소중한 우리 아들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 않았으니, 임신 중 이상 증상으로 대형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기도 했고 신종플루의 대유행으로 아내가 걸려 맘을 졸이기도 했다. 걱정과 갈등 속에서 운 좋게 넘어가고 넘어가 결국엔 아기를 낳게 되었다. 아이 머리가 나오는 것을 보는 순간부터 나는 아이가 친숙하고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그렇다.


일단 내 아들이 생겼다는 사실은 굉장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대학시절 산악부 선배들이 아이를 데리고 오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그저 비현실적으로 바라보기만 했는데, 나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은 대단히 색다르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꼬물대는 아기를 보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산후조리원을 나와 맨 처음 장모님 댁으로 가서 아기를 눕혔을 때, 아기는 고작 내 양 주먹과 팔꿈치를 모았을 때 주먹에서 팔꿈치 정도의 크기 밖에 안 되었다. 이런 작은 생명체가 어린이가 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게 바로 부모의 역할이겠지. 나는 이제 부모가 되었다.


한편 늙어가는 부모님은 여기저기 아파서 서울의 병원에 검진하러 가는 일이 많았다. 겸사겸사 아들 집에 오는 일이 많았으니 다행이기도 했지만 젊어서 혹사한 몸이 쉽게 회복되진 않았다. 꿈에 그리던 손자를 보게 되었지만 정작 당신의 몸은 여기저기 불편한 데가 늘어났다.


그렇다고 아들이 태어났다고 모든 게 원활했던 것은 아니다. 아들이 태어나고 두어 달 후 우리 부부는 아들의 목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체구가 작은 엄마 몸에서 나오느라 그랬는지 사경이 생겨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큰 병원에 가서 정기적인 물리치료를 해야 했다. 세상을 날려 버릴 것 같이 큰 소리로 우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작은 생명체는 세상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15번째 우리 집에서 2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결혼을 하면서 이 집에 이사를 왔고 아기를 낳자마자 떠나야 할 상황이 되었다. 더 있고자 했으나 집주인이 들어와 산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단지 내, 처갓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번엔 세 식구가 된 것이니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악필, 2024.6.2)

                    

작가의 이전글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1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