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혹은 즉흥적으로 기회를 만들어 가게 된 대학원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주변에서는 가족 말고 거의 아무도 모르게 다녔다. 물론 대학원 동기 및 선후배는 제외하고. 지금 생각하면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에 졸업을 했으니 대학원 동료들과 오프라인에서 자주 만나고 얘기도 많이 하며 교류했던 거의 마지막 깃수가 아닌가 한다. 사람들도 좋았고 배울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내가 궁금해하는 세상을 좀 더 넓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 내겐 커다란 의미였다. 아주 전문적이거나 깊이가 있진 않았지만 나의 전체적인 삶을 넓히기에는 충분했다. 대학원 동기들과는 지금까지도 정기적으로 만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응원해 준 아내가 너무 고마웠다.
아내에게 고마울 일은 또 있었다. 내 허리가 아팠다 나았다를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 생각한 게, 설렁설렁 산에 다녀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다니기로 했다. 이 약해 빠진 허리에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몸을 만들기 시작했고 띄엄띄엄 가던 산을 매주 가기로 했다. 마침 산악회에서 일부 형님들이 산행을 작게나마 꾸리고 있어 거기에 가담하기로 했다.
그때가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할 때였으니 시점도 절묘하게 맞았다. 가족여행을 갈 수도 없었고, 시골에 가서 모친을 만날 수도 없었다. 골프도 없었고 술자리도 거의 없었다. 산에 가기 딱 좋은 환경. 산은 코로나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으니까. 이 모든 과정을 아내는 아무 반대 없이 이해해 줬다.
근데 이 산행에 대한 나의 결심은, 이러한 시작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었다. 나이 먹어감에 따른 몸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는 것이었고, 내 인생의 큰 축인 산을 다시 접하면서 삶을 추스르는 계기도 되었으며, 젊은 날의 많은 회한과 후회를 넘어 중년이 된 나이에 여유와 새로운 열정으로 진정한 인생의 맛을 아는 계기도 되었다. 나는 무섭게 빠져들었고 참으로 행복했다.
몸도 산과 바위에 익숙해져 점점 좋아졌고 허리 아파 삐끗하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주말의 산행을 위해 나는 화요일쯤부터 대상지를 정해 공지를 하고, 목요일쯤이면 인원을 확정하고, 금요일 장비 등 준비물 체크, 토요일 산행, 일요일 후기작성, 월요일 지난 산행 음미 등등의 주간 일정으로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에 어디 가고, 다음에 어떻게 시행착오를 보완하고, 다음엔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등등 기대에 부푼 한 주 한주가 되었다. 사는 게 이러면 되는 거 아닌가.
한편 회사에서는, 열네 번째 우리 집에 사는 동안 유난히 출장이 많은 기간이기도 했다. 미국, 유럽, 싱가포르, 남아공까지 시야가 많이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초등학생인 아들을 생각해서도 가족여행도 많이 갔고 해외여행도 나름 챙겨간 시기였으니, 우리 부부는 아들의 유년기에 행복한 기억으로 채워주기 위해 노력한 편이었다. 불행히 그 시기는 코로나가 오면서 멈췄지만.
앞서 말한 산에서도 그랬지만, 삶의 획기적 변화는 100여 년 만에 온 코로나로 인해 만들어졌다. 회사는 52시간 근무일수 규정과 이런저런 노동자 친화적 정책으로 특히 많은 변화를 겪었다. 내 입장에서 봤을 땐 과거가 억울할 정도로 너무 회사 다니기 편해진 것으로 보였다. 출근시간이 늦춰지고 퇴근시간이 빨라진 것이었고, 불필요한 회식도 거의 없어졌으며, 야근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권장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워라밸에 더욱 충실하게 되었고 젊은 직원들의 니즈에 더욱 부합하게 되었다. 사실 나의 니즈에 더 부합했지만. 그렇다고 인원을 늘린 것도 아니면서 일이 꾸역꾸역 이뤄지고 있었으니 회사도 그리 손해 볼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편 억지로라도 지지고 볶고 하던 게 없어지고 세대차이를 걱정할 만큼의 나이차를 극복하며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은 쉽지 않았다. 서로 많은 생각과 배려를 해야 오해가 없을 테지만 인간사에서 어찌 모든 게 원활하기만 할 것인가.
내 직장에서의, 내 인생에서의, 그리고 내 산에서의 경험과 경력이 쌓일수록 나의 문제해결 능력이나 삶의 방향을 잡는데 다소 성장을 하긴 했지만 그거 이상으로의 도전적인 일들은 여전히 새롭게 계속해서 나왔다. 그리고 그마저도 이젠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대응해야 하는 중년이 되어 버렸다.
어차피 회사도 내 것이 아니고 내 자리도 일시적인 것이며 내 일도 얼마 하다 말 것인 것을. 나는 집착에서 벗어나 나의 욕심과 감정에서 벗어나 그저 그렇게 흐르는 대로 그에 맞춰 조율해 가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깨달아가게 되었다. 나이 탓이겠지만.
인생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벌어졌으니, 내가 대학 때부터 활동해 오던 산악회의 회장이 된 것이다. 미칠 노릇. 내 몸과 내 인생을 위해 무척이나 열심히 다닌 건 맞지만 이런 그림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인생이 편안하기만 한 건 아니란 걸 이미 알았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내는 이 또한 이해해 줬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다 보니 그럭저럭 일들은 이뤄졌다. 내가 아직 인생에서 배울 것이 너무 많은 모양이다. 참으로 새로운 일, 새롭게 배우는 일이 많았다.
나의 열네 번째 우리 집에서는 무려 6년을 살았다. 아들의 초등학생 시절을 거의 다 보낸 셈. 우리는 집을 사는 대신 청약을 알아봤고 재수 끝에 하나 건졌다. 사실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집값을 생각하면 그냥 집을 구입하기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주제에 골라 청약을 할 수는 없고 그저 순서대로 하자고 했는데 그게 주효했다. 아내와 나는 현시점에 집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청약에 공을 들였던 것.
가족이 셋이니 클 필요도 없고 부유한 것도 아니니 적당히 만족하며 살자는 생각은 아내도 나도 똑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얻은 집은 그에 부합했다.
우리가 청약한 아파트가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걸 보며 2년여를 보냈다. 청약이라는 제도가 정말 사기가 아니고 합당한 것인지, 입주하고 등기를 뗄 때까지도 안심하지 못했다. 특히 입주날 기존 전세가 안 빠져 노심초사한 일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다. 그땐 그렇게 심각했다. 입금 기한의 마지막날에 맞춰 극적으로 전세가 나갔고 그 몇 시간 사이에 입금이 이뤄지고 입주를 하게 되었다. 그 몇 시간 사이에 우리는 새 집에 들어갔고 헌 집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다. 내가 내 집에 들어가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하고 물을 정도로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건 아내의 청약통장 덕이었고, 나는 아내 덕을 제대로 본 대책은 없었지만 운 하나는 좋은 천하의 해운아였다. 그리고 이사한 집에서 멀리 보이는 산을 보면서 이 집은 나한테 딱이라며, 마치 자기 혼자 다 이룬 거 마냥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집이 생겼다. (악필, 202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