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팡스키 Dec 30. 2023

삶의 온기가 데워진다는 느낌

십이월. 경기도 외곽으로 거주지를 옮긴 지 딱 삼 년이 되었다. 이전에 내가 살던 곳은 서울, 강의 남쪽, 관악산이 가까운 동네에 있었다. 높은 산자락 끄트머리와 닿은 동네에는 봄이면 아카시아 꽃의 달큰한 향이 진동하고 여름이면 담쟁이 잎들이 벽이란 벽을 다 뒤덮고 살랑살랑 춤을 추었다. 온 동네 나무가 초록을 벗고 본연의 색을 되찾는 가을과 추위를 나기 위해 몸피를 왜소하게 줄이는 겨울을 보며 자랐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취업하고 일하는 동안 집은 변함없이 그곳 언덕에 있었다.


경기도, 심지어 바다가 보이는 땅끝으로 거처를 옮긴 건 가족의 결심이기도 나의 결심이기도 했다. 가족들은 조금 더 넓은 거실 조금 더 가까운 공원 조금 더 한산한 산책로를 원했고 나는 조금 더 넓은 방 조금 더 쾌적한 도서관 조금 더 가까운 바다를 원했다. 나고 자란 도시를 떠나 일을 그만두고 글을 쓰는 삶에 적응하는 동안 전지구적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을 휩쓸고 지나갔다. 자연스럽게 친구, 지인들과의 대면 교류가 줄어들었다.

  나서서 약속을 잡지 않고, 꼭 가고 싶은 자리에만 가면서 지내는 동안 관계가 단출해졌다. 한 달에 한두 번 서울에 올까 말까 했다. 편안했다. 보고 싶은 사람들만 보고 지내는 건 참 감사한 일이구나. 너무 많은 인간 집단에 둘러싸여 사는 것보다 이 편이 더 맞는구나 생각할 정도로.


그러나 너무 혼자만 있는 것도 그닥 건강에 좋진 않았다. 언제부턴가 ‘이쯤 되면 사람을 좀 만나고 지내야 할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나 영화를 보며 작가나 연출가와 대화하는 일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나’란 인간을 알고 불편함 없이 친밀한 인간을 만나 안부를 묻고 근황을 알아가는 대화도 삶에는 필요하다는 걸, 어쩌면 그런 시간이 밥이나 물처럼 한 인간 개체의 생존에 꼭 필요하다는 걸, 아니 필요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시간이 나를 키운다는 걸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스스로 찾아 들어간 유배지에서의 격리 같았던 기간은. ‘나’를 알게도 했고 ‘소중한 사람’들의 중함을 알게도 했다. 하여 슬금슬금 익숙한 얼굴들과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지던 차였다. 그리고 덥석 기회가 굴러 들어왔다.


카페 일을 시작한 뒤로 대면 교류가 늘었다. 커피를 마시러 오가는 익명의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주말이면 카페에 붙박여 있는 나의 고정일과를 아는 친구들이 따로 약속을 잡지 않고도 이따금 방문하곤 한다. 와서 커피를 마시거나 노트북을 가져와 초과근무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어떤 날은 작정하고 바 테이블에 앉아 나랑 대화를 나눈다. 근처에 비건 식당이 드물어 끼니를 걱정했다며 먹을 걸 사 오기도 하고 퇴근을 같이 하자며 눌러앉기도 한다.

  손님이 없는 한적한 시간엔 에너지 레벨에 따라 쉬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편이지만 친구가 있어서 밀린 이야기를 공유하거나 덮어둔 고민에 함께 골몰하거나 감명 깊게 본 영화 혹은 책을 추천하며 신나게 떠드는 것도 그저 등받이에 기대어 멍 때리는 일도 좋다. 그런 시간들이 삶의 온기를 조금씩 데운다는 걸 이젠 전보다 세밀하게 알게 되어서, 더욱 좋다.


그러다 문득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인파를 지나쳐 멀리까지 와준 친구들의 여정을 생각해 보게 된다. 촘촘하게 혹은 느슨하게 나와 닿아 있는 이 귀한 인간들은 집 앞 카페를 놔두고 지하철을 타고 온다. 나와 달리 평일에 직장을 다닌다. 그들에게 주말이 얼마나 짧고 아쉬운 시간인지 모르지 않는다. 때문에 떠나기 전에 뭐라도 더 주고 싶어 진다.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그래도 맛있는 음료와 디저트를 대접할 수 있어 기쁘다. 원두나 드립백, 디저트를 손에 쥐어 보낼 수 있는 땐 굉장히 뿌듯하다. 맛있게 먹어줘서 좋고. 맛있다고 말해줘서 좋고. 그럴 때면 사사로운 보람이 차오르고 체감 온도가 약간 올라간 듯한 느낌도 든다.


  카페 일을 시작하고 석 달. 주말에 에너지를 몰아 쓰게 되어 월요일마다 기다란 휴식이 필요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 주말에는 어떤 얼굴을 오랜만에 보게 될까 어떤 이야길 나누게 될까 기다려진다. 홀로 고립감을 충전하는 평일을 지나 주말에는 연결감을 충전할 수 있게 되었다. 더 건강한 쪽으로 균형이 맞춰지고 있는 듯하다.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 창밖엔 온통 눈이다. 주변 건물이 슈가 파우더를 뒤집어쓴 케이크 같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손님들이 창가에만 앉는다. 중앙에 위치한 원형 테이블이 줄곧 비어 있다. 다들 따뜻한 음료를 앞에 두고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한 해가 가고 있구나 실감하게 되는 풍경이다.

  나도 창밖에 시선을 두고 지붕 위로 안착하는 눈을 바라보고 있다. 올 한 해 끊기지 않고 닿아 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안부 물을 여유가 있어 감사한 십이월의 서른 번째 날. 연말을 핑계 삼아 고마운 마음을 적어둔다.

  친구들, 동료들, 올 한 해도 무심한 나를 놓지 않아 주어 고맙습니다. 오는 해에도 조금 멀찍이 그러나 너무 멀리는 아니게 옆에 있어 보겠습니다. 그대들의 2024년이 평안하길. 그리고 ”주말엔 언제든 편하게 놀러 오시길!”



매거진의 이전글 바리스타가 비건인 경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