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출근하는 길목에 들르는 곳이 있다. 시장 초입에 있는 소형 할인마트. 반갑게 맞아주는 직원에게 목례를 한 뒤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냉장 식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벽면으로 직진한다. 내가 집어드는 것은 기다란 우유/유제품 코너 끝에서 아주 좁은 영역만을 점유하고 있는 두유, 오트 밀크. 190ml짜리 테트라팩 두 개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카페로 향한다.
내가 있기로 정한 우리 카페가 비건 카페라면 좋았겠지만, 혹은 최소한 음료 메뉴에 대체우유 옵션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2019년부터 비건으로 살고 있는 나는 출근 첫날, 정말 오랜만에 내 손으로 우유 팩의 입구를 벌려 뜯어야 했다. ‘아 커피 내릴 생각만 하고 이걸 간과했구나’ 하고 잠시 사고가 정지했었다. 이후로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우유를 뜯고 팔아야 하겠구나.’ 내가 먹는 게 아니더라도 소비하는 곳에 종사해야 한다니. 마음이 너무 불편했던 것이다.
사장님은 내가 비건으로 식사한다는 걸 알고 있다. 카페 메뉴 중에 내가 먹을 수 있는 디저트가 없어 늘 안타까워하며 주변에서 내가 먹을 수 있는 식사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가져다주는 분이다. 순두부라든가 팥죽이라든가 산채비빔밥이라든가. 가끔 여유가 있을 때는 채소를 쪄서 익힌 샐러드나 잡채, 무조림, 연근조림 같은 반찬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여 건의하면 대체우유를 한 가지 정도 구비해 두는 카페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단 우리 카페의 하우스 블렌딩 원두에 어울리는 대체우유를 찾는 것부터 시작했다. 아몬드 브리즈부터 어메이징 오트, 그린 덴마크 귀리 우유, 매일 두유 등 보이는 것은 족족 사서 라떼를 만들어 보고 시음해 보았다.
사장님은 되도록 모든 재료를 주변 지역 상권에서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선택지가 끝없이 많지는 않았다. 시장 초입에 있는 마트와 시장 끝에 있는 마트 두 곳에서 판매하는 대체우유가 내가 테스트할 수 있는 항목의 전부였다. 결과는 당분이 없고 향이나 맛에서 무난한 어떤 두유 하나와 어떤 오트 밀크 하나로 잠정적 결정을 해두었다.
그러나 모든 시도를 마친 뒤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해보았을 때 허점을 발견했다. 우리 카페는 오픈 넉 달 차. 아직 손익분기점에 이르지 못했다. 수요가 아닌 가치를 따라 재료비를 늘리는 결정을 하기엔 아직 여유가 없을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체우유가 있는지 물어온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아직. 단 한 명도. 수요가 제로인데 어찌 가져다 두자고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사장님에게 드리고 싶은 비건 옵션에 대한 제안을 유보했다. 대신 언젠가 “여기 비건 옵션 돼요?” 하고 물어봐 줄 손님을 기다려 보고 있다. 출근하면 냉장고 한 편에 비건 밀크 두 팩을 소중히 세워두고 그다음 주에 출근했을 때 그대로 있으면 너무 오래되기 전에 내가 마시고 싶은 걸 만들어 마신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를 그 순간을 위해 새로운 비건 밀크 두 팩을 구입해 또 쟁여 둔다.
상상해 보면 내가 비건인데 대체우유가 있는지 물어오는 손님에게 없다고 말하기가 너무 복잡한 심정이 들 것 같다. 나는 비건 옵션이 없다고 답하는 카페의 메뉴판 앞에 서서 무얼 마셔야 할지 하염없이 고민하던 손님이 되어 본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고, 고민 끝에 결국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서 그다지 최선은 아닐 티 음료나, 핫초코에 오트 옵션을 적용해 금액을 추가로 지불하고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비건도 맛있는 라떼나 카푸치노를 마시고 싶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 카페에서 일하는 동안 “여기 비건 옵션은 안 되나요?” 하고 물어올 손님이 있을까. 그렇게 물어주는 손님이 점점 늘어나 우리 카페 차원에서 대체우유를 구비해야 하는 상황이 올까. 아마도 요원할 것 같다.
그러나, 뭐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나는 대책 없는 희망을 품어보기로 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덤덤하게 “있습니다.” 하고 답할 것이다. 원하는 라떼든 카푸치노든 최선을 다 해 만들 것이고 두유든 오트든 그것의 원가가 얼마든 추가금액은 받지 않을 것이다. 최초의 비건 손님이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비건 바리스타가 비건 손님에게 전하는 반가움과 응원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준다면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