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그리고 그리움

by 여흔재


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나

사랑을 알았고, 따뜻함을 느꼈다.

지친 몸을 이끌고도 밥상머리 앞에서

곱셈과 나눗셈을 일러 주신다.

그 사랑이 따뜻하여 열심히 온 마음 다한다,

늘 엄격한 말씀이지만 마음속 깊은 사랑을 알았기에.

시골 장날이면 약속도 없었지만 시장으로 간다.

늘 근엄한 자세이지만 그날만은 따끈한 찐빵과 만두를

사주신다.

누구나 힘들었던 시절!

설빔으로 사주신 붉은 코트와 털바지, 보랏빛 멋진 털구두.

흙이 묻을세라 조심조심 걷는다.

비록 사진은 없어도 머릿속엔 선명한 사진으로 남아 있다.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체증하며 살아온 세월!

전쟁터에 끌려가 원자폭탄이 투하된 바로 그 옆동네서

조국이 해방되는 날 귀향하셨다.

감격은 잠시.

만주로 가셨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살아 돌아온 고국은 또 다른 전쟁터, 6.25 동란!

동네 한 어른이 수장을 당했다.

아버지도 똑같은 화를 당할 뻔한 일촉즉발, 절체절명의 순간.

빨치산 조직원의 한 마디,


“그 사람은 나쁜 사람 아니오.”


라는 증언으로 죽음에서 살아오셨고 100세까지

천수를 누리게 한, 생명의 은인이다.

밤이면 밤마다 산에서 내려오는 이리떼들.

온갖 세간살이 다 거두어간다.

숟가락, 젓가락, 밥그릇, 옷가지, 당장 덮는 이불, 쌀 한 톨 남김없이.

막아서서 가족을 지킬 수 없었던 처절함.

편한 잠자리를 원하는 건 사치다.

밤이면 조부님과 함께 피신해야 했던 기나긴 시간들.

지금껏 가족조차도 모른다, 그 긴긴밤 시간을 어디서 보내셨는지

감히 여쭙는 것도 죄스러웠다.

대답도 듣지 못하고 먼 길 가셨다.


엄마가 한 올 한 올 손수 짜놓은 수의!

수십 년 만에 빛을 본, 샛노란 색이 곱기도 하다.

고운 옷 입으셨다.

지난해 99세 12월까지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셨다.

밥을 지어 드시고, 손수 세탁기 돌려 구김살 하나 없이

좌아악 좍 펴 건조대에 말리시며.

자식들 폐 될까 만보기 허리에 달고,

어제는 2 천보, 오늘은 3 천보 자랑하셨다.

잠자는 시간이 아니면 결코 누워계신 모습을 뵌 적이 없다.

정해진 시간에 약을 드시고, 약을 넣고, 바르고.

머리맡에 둔 전화기 탁자 위에는 맏이부터 막내까지 전화번호 적어

두시고 이제 먼 길 떠나셨다.


그나마 위로 삼는 건, 3월 응급실에 계실 때


“아버지, 잘 키워주셔서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라는 내 마음속 꼭 하고 싶었던 말씀을 드리며 손을 꼭 잡아드렸다.

그러자 진심어린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시던 모습!

살아생전 아버지와의 실질적 이별의 순간이었음을, 가신 뒤에야 회상해본다.

그 뒤 머뭇머뭇하는 사이 두 번 다시 뵙지 못하고 홀연히 가셨다.


나는 믿는다, 영혼불멸설을!

플라톤이 그랬던가?

'죽음은 육신의 집을 허물고 영혼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그것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믿음이고, 정서인 까닭에.

아버지는 이제 엄마 곁에 자리하셨고, 우리 형제들 마음속에 자리하셨다.

힘들 땐 언제든 아버지와 얘기를 나눌 것이다.

삶은 만남이고 이별의 연속이다.

회자정리, 생자필멸, 거자필반!

인연의 연관검색어로 떠오르는 부처의 말씀들.

만나고 헤어지고 또다시 만나고.

이별은 우리를 연단시키고 숙성케 한다.

이제 내 마음속엔 더 널찍한 공간이 생겼다.

그곳은 이별을 만나고 배웅하는 쉼터가 된다.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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