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지 않았다’ The light in the darkness
끊임없이 달려드는 심리적 허기를 달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꾸만 탈출하려는 영혼을 붙잡으려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간다.
남편으로 인한 어려움으로 내내 곪아 터진 상처 부위는 겨우 이제 살이 붙었다 싶었지만 새살이 돋을 잠시의 겨를을 허락치 않고 뾰족한 날카로움이 상처를 후벼 파듯 다시금 아픈 회상에 시달리게 했다. 달랑 달랑하게 붙어 있는 숨 통조차 허락 치 않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해 곧 꺼져 버릴 것 같이 위태롭기만 한 여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뉴스 속보와 같은 일들이, 또 누군가에게는 일년 한달이 무섭게 도돌이표 달린 후렴구 마냥 지긋지긋하게 돌기를 반복한다.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군가가 나라는 게 원망스럽기만 하다.
오랜 역사가 담긴 주립대 안 교회가 불타 올라 가나에서 온 주드 목사가 죽은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렇듯, 종종 우리인생을 찾아 오는 사건들은 시간과 때를 구분하지 않고, 느닷없이 조용하고 섬뜩하게 찾아 온다. 대부분 나쁘거나 슬프거나 혹은 더럽게 말이다.
잘못 없이 죽어 간 영혼에 대한 허무함과 미안함이 죄책감으로 다가오는 그 순간, 죽음의 이유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끈적거림으로 안타까움으로 질척이다 분노로 얼룩지고, 더 이상 사람이나 세상 탓도 소용이 없다. 그럴 때 비로소 하늘 그 위 어딘가에 있을 하나님을 바라보며 억지를 부려 보기도 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분을 뜻임을 인정하려 어렵고도 억지스러운 결심도 해본다.
데이빗 목사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역을 함께 하던 주드 목사의 죽음도 모자라 학교의 이익 목적을 위해 100년도 넘은 교회 대신 학생 강당을 짓겠다는 주립대 이사회 측의 결정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유산인 교회가 철거 위기에 놓이게 된고 변호사 선임을 위해 오랫동안 인연을 끊고 지낸 친 형을 찾아 간다.
삶이 그렇다. 높 낮음 없이 찰랑이는 듯 보여도 궂은 날씨 한번으로 쓰나미처럼 큰 파도가 밀려들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쉼 없이 삶을 파헤치고 엎친데 덮친 격 연속적으로 벌어진 일들을 감당하려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때 맞서야 할 두려움과 걱정, 불안은 삶을 통째로 부수기에 충분할 만큼 위력이 세다.
이때부터 목적을 향한 삶은 이정표를 잃고 엄청난 속도로 하나님의 말씀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흐른다. 극복할 수 있는 길이 하나임을 알면서도 쉽지 않은 처리 방법으로 후에 온전히 맡기지 못함을 후회한다. 데이빗 목사라고 다를 바 없다.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최대한 사람이나 사건보다는 그 안에서 일하실 하나님에게 집중하기로 했지만 순간에 눈이 가리워져 마음과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지러운 나의 현재 삶 속에서도 그와 같은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를 공짜로 기대했다.
기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열광한다.
지치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간접적이나마 영화를 통해 체험하면 속이 좀 풀릴까 싶었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기가 막힌 놀라운 기적은 없다. 그저 살아가는 터 안에서 잔잔하고 담담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 역시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까지의 나의 상태는 무조건 '지침'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에너지가 소비되어 어떠한 의욕도 다시 회복함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껏 혼자 힘으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또 다시 커다란 폭풍우 속을 걸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편 대학 이사회 측과 맞서 싸우기로 작정한 데이빗 목사는 끝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믿으면서도 악화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지쳐만 가고 주드 목사를 의도없이 행한 실수로 직접적 이유를 제공하여 살해에 이르게 한 학생, 키튼의 남자친구를 찾은 후 결국 참지 못한다. 분노가 폭발한 장면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동질감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었다.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만 가는 삶의 무게,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각기 다른 인격들이 연합을 이루기란 쉽지 않다. 가끔은 그 속에서 손 쓸 수 없어 무력한 내 모습이 처량 하기만 하다. 그 사이 어느 틈엔 곱게 묶어 다스리고 있던 영혼의 끈이 소리없이 풀려난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도록 배웠으나 조종하기가 어렵다. 한번 놓치면 눈 앞에 있어도 손이 닿지 않아 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 유유히 사라져 버리고 마는 풍선처럼 허망하게그 동안 이를 악물고 지켜내 오던 모든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그렇게 날아가 버린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끔은 내 멋대로 하고 싶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타락 하고픈 그런 충동으로 붙잡고 있던 풍선 자락을 까딱하면 놓아버리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도 하게 된다. 누구에게 하는 반항의 표현인지 어찌 할 반항 인지도 모른 채, 이런 심경의 변화와 그 동안의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충동을 억누를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는 것이예수님의 사랑,바로 신앙의 힘이다. 그렇게 힘겹게 싸우며 쌓아 온 신념과 기준들이 사소한 마음 가짐, 세상 풍파 한큐로 까딱하면 무너질 지 모른다는 점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결국 숨 한번만 고르게 쉬고 돌아보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순간을 닥 달해 견디지 못하는 것 일뿐 임을 말이다.오늘도 그 무모 하기만 한 한 큐에 너무 집착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또 다른 주인공 키튼은 도통 느낄 수 없는 그분에 대해묻는다.설교를 통해 주일마다, 습관적으로 혹은 배워 온 대로 나와 함께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더이상 들리지 않을 때 갑작스러운 혼란을 느끼고 어디쯤 계신지 묻는 건지, 이런 나를 어떻게 좀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세상과 영의 중간 지점에서 나부낀다. 범인의 등장으로 괴로워하던 데이빗 목사가 하나님의 방향대로 키를 돌리는 순간, 키튼은 목사를 찾아가 자신과 같은 젊은 세대가 왜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교회의 순수한 정체성 대신 오히려 상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그녀의 설명은 현재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깊이 고민해 봐야 문제이기에 더욱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질문으로, 또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하나님은 그런 질문도 놓치지 않고 키튼과 우리에게 그 분의 방법 대로 살아계심을 보여주신다.
돌연 내가 겪은 것과 같아 정확히 어디쯤 그 답이 있는지 알고 싶기도했다. 늘 같은 그 질문을 심심할 때마다 꺼내 보는지도 모르겠다.
영적 부족함과 성령 불 충만을 합리화 시키고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마땅히 한 것들을 배제 시킨다. 나에게도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환경을 통해 끊임없이 보여주시고 말씀하신다.
영화 속 독백처럼 가끔은 끝도 없이 고통스러 울 만큼 난해한 질문들을 쏟아 낸다. 과연 그 많은 불안들은 어디서 오는지, 의심과 원망들이 뒤섞여 죄책감의 알 수 없는 행방이 괴로울 때도 있다. 그러나 매년 행사처럼 반복되는 힘들고 어리석은 질문도 필요하다고 다독거려 주신다.
늘 동일한 모습으로 내 수준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그 분이 역사하고 계심을 확인 시켜 주신다.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랑의 무게감. 내가 너무 소중하면 그 무게를 재기가 불가능해지고 사람이나 환경,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나머지 것들은 희미해진다. 사랑과 희생의 이유가 희미해져 흔들릴 때 데이빗 목사에게 찾아 온 하나님은 어떤 음성을 들려 주셨을 지 상상하며 설레임 가득한 그 시공간 속에 나도 함께 있었다.
찬반이 갈리는 무서운 군중들. 종종 인간에게 참으로 알 수 없는 공포심을 느낄 때가 많다.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위협감과 알 수 없는 괴기감으로 똘똘 뭉쳐 군중을 이룰 때, 그 공포심은 더욱 증폭된다. 순간 흉측하게 다 타 들어간 교회는 살해 현장으로 뒤바뀌어 그 앞 수 많은 무리가 각자의 사명감을 가지고 곧 터질 듯 성난 얼굴로 심판의 시기를 노리고 있다.
선하신 하나님. 각 사람에게 그분이 이룰 선하심이 무엇일지, 몇 백 년의 역사와 함께 타 들어 간 교회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서 어찌 살아날지가 관건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전보다 더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교회가 세워진다면 반대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실제 살아 계신다고 만 천하에 알릴 좋은 기회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영화 속 십자가의 사랑은 맥 없이 믿는 자들만이 아는 또 다른 세계를 던져주고 숨은 그림이 되었다. 스토리의 결말은 김 빠진 듯 싱겁게 흘러갔다. 극장을 벗어나며 숨은 그림에 대한 답을 찾느라 더 많은 질문을 만들고 쏟아냈지만, 영화 속에서 이미 제시한 희생이란 단어에 종착점을 찍으며 의미가 없어졌다.
십자가의 의미는 단지 예수님이 흘린 고통과 뜨거운 피만이 아니다.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와 수평을 이루는 나와 너. 연합-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이다.
왜 우리 삶 속에서 나열 된 세 가지의 단어들은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한 세 단어를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누구도 그 희생의 장본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미 원치 않는 희생까지도 당연히 강요되고 너무 많이 떠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남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것은 오지랖이며, 멍청한 짓이고 나아가 더한 억울함을 초래 할 두려움의 씨앗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이점을 노려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 보기 좋게 포장해 홍보한다.
데이빗 목사라고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오른 뺨을 맞고 언제까지 왼쪽 뺨을 내밀어야 하는지 그 억울함에 잠시 흔들렸다. 또 다른 흑인 목사님의 엄한 꾸지람을 통해 데이빗 목사는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싸우기로 결심했을 순간부터 빠져 있었던 것-<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셨던 모든 일들, 근본적인 이유와 정신>말이다.
자주 잊어버려 탈이지만, 하나님은 늘 동일하고 신실 하셔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한 없이 베푸시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기도를 통해 성령이 하시는 말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 안에는 내가 하지 못하는 사랑과 희생의 마음,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거쳐 내게 가장 적절한 재료를 찾도록 하신다. 요술 봉으로 주문만 외우면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주시고 자유 의지를 통해 선택 가능한 장치를 통해 조건 없이 언제나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신다. 그것은 억지로 강요 당하는 고통스러운 희생이 아닌 것이다.
영화는 속 시원히 이렇다 할 결론을 짓지는 않는다. 그들이 내린 결정을 통해 정확히 누가 어떠한 이익을 서로 나누어 가졌는지, 어떤 고통과 희생을 나누어 감당해야 하는지 그로 인해 행복해졌는지, 불행해졌는지 등 눈에 보여지는 세상적 성공 결말은 아니 였다.그러나 더 정확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던 그 순간 성 막이 갈라지며 인간과 하나님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사건처럼,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면 보이지 않는 화합이 존재했고,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간에 하나님이 분명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보여주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선택하도록 오랫동안 깊은 울림을 선물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안의 문제점을 보았다. 어떠한 일을 행하고 감당해야만 할 때 나는 어떤 반석 위에 서 있는지 말이다. 나의 마음 가짐과 밑 둥은여전히 남아 있는 이기심과 욕심들이 켜켜히 쌓여 나도 모르게 녹슬어 있었다. 예수님이 그토록 전하고 싶어 하셨던 사랑을 보지 못했다. 대체 나는 어떤 태도로 그 사건을 들여다 보았으며 무엇으로 저울질 했는가 말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어떤 한 부위의 사건이 아니라 수평 선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누군가가 있을지라도 손을 내밀어 잡아 주는것. 그렇기에 비로소 '함께'가 되는 것 말이다.
매년 행사처럼 매번 같은 질문에도 짜증 한번 없이 내 수준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살아계심을 확인 시켜 주심에 감사한다. 더딜지라도 과정을 통한 발전이 아주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반복되어 질지 모를 환경 속에서 죽을 때까지 나는 사랑과 용서와 화해하는 방법을 끝도 없이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무더웠던 여름의 중턱, 맛 본 자만이 아는 주님의 치유 손길과 회복을 다시 한번 경험했고, 살아있는 동안 끝도 없이 그리워할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오늘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