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예술은, 특히 문자로 적힌 소설, 수필, 시 등의 문학은 저자가 펜을 내려놓는 순간, 독자가 책을 펼치는 순간마다 그 의미를 달리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백 년 전에 저자가 글을 쓰며 했던 생각이 백 년 후의 독자에게까지 이어지리라는 바람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론이 다소 길었는데, 결국은 책을 읽으며 내가 했던 생각을 가감 없이 적고 싶다는 말을 하려는 중입니다.
책장에 수 천권의 책이 꽂혀 있지도 않고, 철학을 전공해서 철학 전공 책이 한가득 있지도 않습니다만, 알베르 카뮈와 헤르만 헤세가 단순히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만 묶이는 것은 아쉽지 않나 하는 생각에 글을 적습니다. (카뮈와 헤세를 엮어서 다룬 글이 혹 있다면 꼭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디까지나 헤세의 책 몇 권, 카뮈의 책 몇 권 읽은 대학생의 글이므로 그만큼 부드럽게, 하지만 가볍지 않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최근 헤세와 카뮈의 책을 여럿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 둘의 생각은 어느 정도 닮은 구석이 있다는 점입니다. 아래는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헤세의 에세이집 <삶을 견디는 기쁨>의 일부입니다.
"오늘날의 문화가 비천하고 우리의 삶을 멋없이 초라하게 만들며 우리의 정신적, 문화적 업적이 지극히 사소하기 때문에, 우리들 눈에 보기에는 중세처럼 분명하고 단순하게 중앙집권화 시킨 삶이 훨씬 건강하고 믿음직스러우며 질서정연하고 신앙적으로도 훨씬 성숙하며 순수와 소망이 가득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번지르르한 말일뿐이며 수사적 표현으로 고귀한 척하는 수치스러움에 가깝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삶은 당대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언젠가는 스쳐 지나가 버리겠지만 우리 각자에게는 생과 사를 가늠할 정도로 중요한 과제를 저마다 안고 있다. 그 과제는 평범하고, 교훈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점들은 '해결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이며, 그것은 그저 우리에게 고통 그 자체만을 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곧 우리의 삶이 되며, 기쁨이라는 감정과 삶에서 느껴지는 고귀한 가치는 오직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을 견디는 기쁨 - 두려움 극복하기 중>
카뮈의 책 아주 일부를 읽고 적었던 이 글을 보면, 우리가 이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카뮈는 그럼 자살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고 적어놨습니다. (물론 저 두 책의 내용은 이미 까먹었습니다. 하하)
'고통'을 다루는 태도는 이 둘 사이에서 크게 갈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삶 전체는 고통이고, 이를 이겨내는 것 자체가 삶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헤세는 그의 에세이에서도, 그런 문제점들은 해결되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 기쁨과 삶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고귀한 감정들은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만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신에 대항하여 신이 내린 벌을 묵묵히 이겨내는 것,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알베르 카뮈와
고통은 언제나 주어지고, 그 과정 속에서 삶의 고귀한 감정들을 느낀다는 헤르만 헤세의 주장은
적어도 저에게는 비슷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실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하는 쇼펜하우어도, 삶은 고통의 바다라고 말한 스콧 펙도 한 가족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제 삶의 비슷한 시기에 번갈아가며 읽었던 헤르만 헤세와 알베르 카뮈는 왠지 형제 같습니다. 서로 다른 시기에 태어나 비슷한 시기에 죽었지만
삶의 마지막에 둘은 좋은 형제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삶을 좀 더 살아서 부드러워진 헤르만 헤세(고통 속에서 삶의 기쁨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좀 젊은 나이에 헤세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알베르 카뮈(고통이 싫다면 자살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을 합니다)
카뮈와 헤세는
삶의 고통을 대하는 교과서가 출간된다면
제2저자, 3저자로 가장 알맞은 철학자 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