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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Nov 21. 2023

흑역사를 묻으며

생활매체연구 (3)

개요 :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 후 두 달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를 통해 잊고 있던 옛 계정을 발견했다. 그 안에 담긴 흑역사를 봤다. 부리나케 흔적을 감췄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게 인스타그램은 무엇이었을까 하고서. 추억을 기록하는 용도를 넘어서 오만함과 허영심이 투영된 옛 게시물을 봤다. 그런 감정들을 완전히 지울 수 없어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이런 나 자신을 혐오하기보다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을 교훈으로 삼고, 다양한 감정들을 선용할 수 있는 온전한 나로 살아가야겠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을 통해서 삶에 관한 이해가 깊어지는 시간을 만끽하면 좋겠다.




“오빠. 옛날 인스타그램이 아직도 남아있네? 옆에 팔짱 낀 이 여자는 누구야?”

“응? 내가 팔짱을 꼈다고? 누구랑?”

“아니야. 뻥이야.”


잠에서 깼다.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꿈에서 말한 것인지 실제로 말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내가 일어나자, 내가 묻기도 전에 사건의 전말을 알려줬다. 새벽에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내가 예전에 쓰던 인스타그램 계정을 찾았다고 했다. 다른 여자와 팔짱을 낀 것은 장난치려고 거짓말한 것이 맞지만, 아내가 들어서 보여준 폰 화면에 떠있는 사진들을 보고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아내는 여태껏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제발 좀 해라고 할 때는 어떻게 하는 줄 모르겠다면서 시도조차 해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인스타그램을 끊자마자 사용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듯 청개구리 같은 면이 있지만, 이제라도 보석 같은 아내의 글을 볼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서 어떻게든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해 주고, 알고리즘이 너를 망칠 수도 있으니 다른 게시물을 누를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예전에 사용하던 계정을 발견했다고 했다. 얼떨결에 내 이름을 검색했는데 두 개나 떴다고. 나르시시즘으로 범벅된 프로필 사진은 버젓이 공개되고 있었다. 피드에는 구토를 유발하는 글과 사진들이 도배되어 있었다. 아내와 대학생 시절에 연애하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럽스타그램 #먹스타그램… 스크롤을 내릴수록 손이 오그라들어서 스마트폰을 움켜쥘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폰을 집어던졌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런데 도저히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비밀번호 찾기를 시도해 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래도 두 계정 중 가장 심각한 하나는 전화번호가 등록되어 있어서 계정에 접속할 수 있었고, 바로 팔로워와 팔로잉을 다 삭제한 뒤 비공개로 전환했다.


남은 하나는 전화번호도 등록되지 않았고 이메일로 찾기도 안 돼서 다른 계정으로 사칭 계정이라고 신고하기까지 했다. 별별 짓을 다 해봤지만 방법을 못 찾아서 우울했는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기적이 일어났다. 문득 비밀번호가 기억이 난 것이다. 계정에 접속이 되자마자 처음 찾았던 계정에 했던 조치를 동일하게 시행했다.


급한 불을 끈 다음, 긴장을 가라앉혔다. 이제는 계정을 지우는 일이 남았다. 지우려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계정을 지우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우울할 때 보면 힘이 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어줬다.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다. 생각해 보면 평생의 놀림거리로 삼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내게 먼저 알려주었다. 그래서 지우지는 않고 모든 것을 비공개로 전환한 다음에 로그아웃했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하고 나서 두 달이 지났다. 완전히 결별했다고 생각했는데 옛 계정과 과거의 게시물을 보니 인스타그램은 도대체 뭐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애를 시작해서 신이 났을 때는, 순간적으롤 떠오르는 감정과 일상 하나하나가 다 중요했던 것 같다. 그 마음은 분명 소중한 것이 맞고 그때 충실하게 반응하는 것도 맞다고 생각한다. 그때 충실한 덕분에 좋은 추억도 많다.


그런데 한편으로 SNS에 내 감정을 띄우려고 했을 때, 마음 한 편에 숨어있는 의도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질문도 생긴다. 그때 내 감정은 사랑하는 순간을 일종의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로 치환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혼자였던 내게 드디어 연인이 생겼다. 상황이 역전됐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외롭지 않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세상아 날 봐라!’고 인스타그램에 외쳤다.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자랑 좀 그만해’ 또는 무관심.


최근에 삭제한 인스타그램 계정도 정도의 차이일 뿐 다르지는 않다. 나름대로 잘 정돈된 글과 그림을 내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출판한 콘텐츠 중에는 사회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획한 것도 더러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순수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된 오만과 허영이 가득한 게시물은 훗날의 나를 확실히 부끄럽게 했으니. 세상은 코페르니쿠스 이후에도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만큼 오만과 허영은 쉽게 끊어낼 수 없다. 그게 됐다면 브런치에 글을 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종이로 된 일기장에나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연결 속에서 대안을 찾고 있다. 중독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허영심을 부추겨 책상 앞에 글을 쓰도록 앉히는 것이다. 오늘도 이렇게 정신을 가다듬는다.


지난날의 모습 때문에 좌절하거나 후회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만의 기질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선용하는 방법을 탐구하고 싶다. 이런 생각에 입각해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쓰고 아내는 인스타그램에 독후감이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함께 마주 앉아서 글을 쓰고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 속에서 삶에 관한 이해가 깊어진다.


아내는 내가 지난날에 만들었던 계정을 보면서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안도했다. 차라리 인스타그램 사용법을 몰라서라도 안 했던 게 다행이라고 했다. 지금은 선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지난날의 내 게시물을 보면서 절대로 나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옛 계정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나란히 묻었다. 말끔히 지워진 것은 아니라서 가끔 내 안에서 자만심이 솟구칠 때면 억제기로 쓸 생각이다. 흑역사도 역사인 만큼 확실한 교훈이 된다.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걷어차는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교훈을 삶으로 옮겨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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