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아직 덥지만 하늘은 청명한 초가을이다. 한쪽 눈을 가리고 하늘을 보았다. 온통 하늘빛에 눈은 더욱 부시다. 한쪽 시력만으로 살아가는 그 사내가 궁금하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사십 대 초반에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과제를 위해 각종 세미나에 참석했다. 한 번은 부산 해운대에 있는 학술원을 찾았다. 1박 2일의 빡빡한 프로그램을 따라가야 했기에 서둘러 입장했다. 뒤늦게 도착한 무리들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신경이 쓰였다.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양팔을 들어 기지개를 쭉 켜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톡톡 쳤다. 돌아보니 사내였다.
“어머나 교수님! 안녕하세요.”
사내의 강연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는 멋쟁이였다. 살아온 날들의 깊이가 목소리, 미소, 주름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져 있었다. 나를 알아보는 것에 더욱 놀라웠다.
“절 알아보시네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강의가 있어서요...알아보다마다요. 눈에 띄잖아요. 하하”
살짝 민망했다. 질문이 많았던 나였기에 기억에 남아있었나 보다. 인사 몇 마디 주고받고는 돌아앉으려고 하자
“저기 내가 잘 아는 꼼장어 집이 있는데 이따가 저녁 먹으러 안 갈래요?”
뜻밖의 제안이다. 이후의 프로그램에도 참여해야 했고 단 둘이 시간을 갖는다는 건 어색하기도 하고 생각해 볼 문제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네~ 가요”
야릇하고 짜릿한 느닷없는 반항에 즐거웠다. 사내도 신이 난 모양이다. 사람들이 자기 찾느라 야단일 거라며 키득거린다. 단골집이라고 소개한 그곳은 허름해 보였지만 그래서인지 원조의 느낌은 확실히 들었다. 살아있는 꼼장어가 통째로 벗겨진 채 숯불 위에서 꼼지락 흔들거렸다. 질긴 생명력으로 끝까지 살아보겠다고 바동거리는 놈을 종업원이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냈다. 토막으로 잘려나가면서도 좀처럼 포기하려 들지 않는 삶. 치지직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마지막 발악의 몸짓을 멈추자 입 안 가득 침이 돌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해변을 걸었다. 2월의 끝자락은 매우 추웠다. 매서운 바닷바람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추위와의 사투는 술기운을 가시게 했고 일탈의 자유를 망가뜨렸다. 사내가 팔짱을 끼라며 팔을 내밀었다. 순간 놀라기는 했지만 내민 팔이 부끄러울까 “그러지요 뭐” 가볍게 받아치며 팔짱을 끼었다. 사내에게 팔을 걸자 내 몸은 서서히 데워졌고 마음에서도 불이 지펴졌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문틈으로 본 세미나장의 분위기는 진지하고 엄숙했다. 고요함을 깨고 들어 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기 학술원 세미나는 처음인 데다가 사내와 함께 있다 보니 신경이 쓰였다.
“교수님,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방에서 조금 쉬었다가 갈게요”
“그게 편하겠어요?”
“네, 괜히 말나기 싫어요.”
혹여 사내가 불편해할까 봐 발랄한 어조로 대답했다. 세미나장은 18층, 내가 묵을 방은 16층이었다. 승강기는 더디게 한 칸 한 칸 내려갔다. 걸어가는 게 빨라 보였다. 옆에 있는 비상구의 문을 열며
“저 그냥 계단으로 갈게요, 오늘 만나서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내가 데려다 줄게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교수님 먼저 들어...”
비상구의 문은 굳게 닫히고 내 입술도 굳게 닫히었다. 그는 나를 벽 쪽으로 밀치더니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는 아주 깊고 또렷하게 나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방어할 틈도, 예측할 틈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났다. 계단을 밝히는 불빛만이 우리를 쪼아 보고 있다. 사방은 무서울 정도로 적막해 어떠한 비밀도 담아내려는 듯했다. 이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애써 생각해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례했다면 미안해요, 나를 봐요”
“.....”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봐 줘요”
볼 수가 없었다. 나의 교과서는 용납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래 사건이다. 지금껏 잘 포장해서 책갈피에 예쁜 꽃잎하나 코팅해 놓고는 친구들이 오면 자랑도 하고 스스로 뿌듯해하며 펼쳐보곤 했던 구김 없는 내 교과서. 그는 아무렇지 않게 사정없이 북 찢어 버리더니 미안하다고 한다.
“내 눈을 바라봐 줘요, 괜찮아요?”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눈을 들여다봐야 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눈을 치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의 눈빛에는 비장함이 어려 있었을 게다. 어떤 해명이라도 듣기 위함이다. 또 한 번의 배신. 그는 고개를 돌려 더 깊이 나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그의 오른손은 나의 젖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내 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왼손은 목덜미를 감싸 안으며 아주 은밀히 아주 부드럽게 달콤한 입맞춤을 유도해 갔다. 온 우주는 나의 반응에 집중했다. 비상구표지판에 그려진 사람도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멈춰 서있다. 충분히 밀쳐낼 수 있는 상황이다. 뺨을 휘갈긴 다해도 정당했다. 나는 선택했다. 이성도 감성도 존재하지 않기를, 나는 그렇게 허락했다.
새벽 2시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해변으로 나왔다. 불과 6시간 전만 해도 바다는 푸른빛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무색이다. 전경은 배경으로 물러나 버렸다. 멀리서 한 무리를 이루는 사람들이 재잘거리며 다가왔다. 세미나장에 늦게 도착했던 그들이다. 그 가운데에는 사내도 있었다. 가까이 올수록 심장은 요동쳤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해도 좀처럼 들어먹지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해지자 이젠 동공마저 흔들렸다. 술에 취한 그들은 나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갔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내게 주목해야 했다. 단 한 사람만은 시선을 빗기듯 마주쳐야 했다. 그것이 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고 뭐지? 왜지? 했던 의문으로부터 해답을 찾는 단서가 될 테니까,
그날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나갔지만 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내의 스튜디오로 찾아갔다. 나에 대한 생각을 확인받고 싶어서였다. 사내는 특유의 부드러운 음성으로 맞아주었지만 결코 그에게서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닌 듯 보였다. 곧 그곳에서 스터디가 열린다고 했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다급해 보였다. 그의 눈빛은 흔들렸다. 난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며칠 동안 옷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있었다. 묘한 감정의 회오리가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화가 나기보다는 사내의 달콤한 키스가 생각났고 원망하기보다는 사내의 부드러운 말투, 손길이 떠올랐다. 하지만 사내를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마음은 아니었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이성이 감성보다 앞설 수 있었던 건 가정이란 울타리가 견고했기 때문이다.
사내는 꼼장어 집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가족 이야기를 하며 어릴 때 한쪽 시력을 사고로 잃어버렸다고 했다. 나머지 한쪽도 점점 나빠진다고 말했다. 두 쪽 모두 잃을 것을 대비해 감각을 익혀 나간다고 말한 사내는 어떻게 순응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것이 여자들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하나의 수법일지는 모르겠지만 내용만큼은 진심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쁜 남자인 줄 알면서도 끌리는 이유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난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게 매력이 없었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원치 않았더라면 작은 일탈마저도 없었을 것이다. 그날의 기억을 평생 가져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그때의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사내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있는 그대로 나를 보살펴줘요. 내가 아프면 그냥 아프구나 힘들면 그냥 힘들구나, 라구 위로해 주세요”
‘그래요 난 당신이 이따금씩 보고 싶답니다. 어떻게 지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