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 성미는 예쁘고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성미는 늘 혼자였다. 왕따를 자초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혼자 밥 먹고, 혼자 공부하고, 쉬는 시간에도 혼자 나갔다 오기 일쑤였다. 난 그 친구가 궁금했다. 점심시간 알림종이 울리고, 성미 옆으로 의자를 끌고 가 도시락을 펼쳤다. 농담 몇 마디 건네고는 친구하자고 했다. 나중에 성미가 말했다.
"네가 다가왔을 때 무척이나 설렜어. 넌 친구도 많고 화려해 보이고 나랑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거든. 기쁘고 좋고 하면서도 어색하고 그랬어.“
성미는 도시락을 싸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우리는 쉬는 시간을 이용해 손잡고 매점으로 달려가 과자도 사먹고 분식을 나눠먹기도 했다. 성미는 내게 웃음을 내어주기 시작하면서 자기의 이야기도, 고민도 털어놓았다. 아빠는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집을 나가 현재는 친할머니와 동생과 살고 있다고 했다. 친구들이 자기의 처지를 아는게 싫다고 했다. 그때 난 성미를 지켜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린 3학년이 되어서도 거의 매일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지에 그림을 그리고 색칠도 하고, 여러 모양으로도 접었다. 할 말이 없을 땐 그 당시 유행했던 유안진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와 같은 유명시를 적어 보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성미는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나는 예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는 각기 다른 길로 갔다. 성미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고 집에서도 나와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시내버스 차장으로 있을 때 나도 같이 버스에 올라타 토큰을 걷은 일도 있다. 하지만 지속된 만남은 어려웠다. 친구를 지켜줄 수 없는 마음은 죄책감으로도 이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점차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소식이 끊겼다고 생각하고 잊고 지내던 날, 대학교 1학년 때이다. 학교 앞 카페에 누군가 찾아왔다고 조교가 말하였다. 누굴까 궁금해 하며 카페로 달려가 보니 성미였다. 더욱 놀라고 당황했던 건 포대기에 아기를 업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20살 많은 남자와 살고 있다고 했다. 학교 친구들이 볼까 순간 부끄러웠다. 불쌍하고 가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와 난 어색한 만남을 몇 차례 가진 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고 자연스레 멀어졌다.
많은 시간이 지나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도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았다. 어느 날 ‘따르릉~’ 성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소문 끝에 내 연락처를 알아냈다고 했다. 남자와의 사이에 두 아이가 있지만 곧 헤어질 거라 했다.
성미는 내게 반찬도 만들어주고 아기 옷도 사다 주었다. 여러 차례 우리 집에 찾아왔고 더 깊은 것까지 함께 하고 싶어 했다. 그럴수록 난 부담스러웠고 죄책감은 끝없이 차올랐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듯이 우정에도 유통기한이 존재하거늘 이 친구는 왜 자꾸 나를 찾는 것인지, 도망치듯 그녀에게서 빠져나와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또 10년 정도 흘렀을까? 다시 성미가 나를 찾았을 땐 예쁘고 순수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거칠고 억센 모습만 남아있었다.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며 힘겹게 살아온 그녀는 자기 동생의 죽음조차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성미는 보는 사람마다 나를 소개하기에 바빴다.
”나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 내가 제일 사랑하는 친구야“
민망하고 어색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만큼 나를 좋아하고 자랑삼는 친구가 또 있을까? 그동안의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만남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런데 성미는 자꾸만 내게서 돈을 빌려갔다. 동료들과 함께하는 식사자리까지도 나를 불러내더니 회식비를 내달라고 했다. 화가 났다. 나를 좋아하는 것인지, 돈이 필요한 건지 헷갈렸다. 더 이상 날 찾지 말라고 모질게 말한 뒤 그녀를 뿌리쳤다.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녀가 궁금해 전화를 걸면 ”지금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기계음만 울릴 뿐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집으로 찾아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자신이 없었다. 지금껏 그녀로 부터 거절 당해본 적이 없는데, 날 거절할까봐 겁이 났다. 성미는 중학교 때 나와 나눈 편지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오랫동안 보관했다가 이사할 때 없어진 것 같다. 어쩌면 나의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우정, 절대 변치 말자던 맹세는 시간이 갈수록 약속에 대한 차용증처럼 나를 옭아매왔기 때문이다.
7년 전 8월의 어느 날이다. 누군가로 부터 페이스북 메신저가 날아왔다. ‘이모 저 ㅇㅇㅇ이예요. 이리로 전화주세요’ 성미의 큰 딸이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는 주저앉았다. 성미가 뺑소니차에 치어 죽었단다. 내일모레가 49재라고 했다.
”이모한테 제일 먼저 알려드리려고 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요. 이모는 엄마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잖아요.“
변두리 납골당 한편에 추모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영정사진 속 성미는 환하게 웃고 있다.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았다. 끝까지 책임져 주지 못한 죄책감과 이젠 정말 끝이구나 하는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감. 두 마음이 교차했다.
유골함이 안치되어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맨 꼭대기에 있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자식들이 급하게 절차를 치른 듯 했다. 눈물이 솟구쳤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내가 성미보다 조금 형편이 났다는 이유로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도리어 그녀가 나를 책임져 준건 아닐까? 성미는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성미는 묵묵히 나를 지켜왔을 뿐인데, 나만 성미를 내치기도 하고 부둥켜안기도 하면서 의인인 냥 지킬 수 없는 약속만 지키고 살았던 건 아닐까?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참담하기도 했다.
‘성미야 부디 다음 세상에서는 나 같은 사람 말고 지초(芝草)와 난초(蘭草)처럼 향기 나는 사람 만나 너의 향기를 마음껏 뿜어내며 행복하게 살길 바래. 잘 가...’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지란지교를 꿈꾸며> 유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