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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Aug 28. 2023

초록 고기의 저주

  몸을 일으켜 문을 지나면 거실이 있다. 냉장고를 열면 물이 있고 그것을 흐린 눈으로 마시면 따뜻하게 데워진 몸에 냉기가 끼쳐 잠깐 멈췄다가 마셔야 한다. 냉동고를 열어본다. 무언가 기대한 것이 아닌데도. 

  “안녕, 나는 썩었어. 그리고 너 알았잖아. 알고 있었잖아, 내가 썩는다는 거. 네가 문을 여니까 빛이 들어오는구나. 너는 어두운 거실에 혼자 서 있다. 냉동고는 이제 밝다. 여기는 지독하게 춥다. 하지만 그 덕분에 박테리아의 증식을 막았던 거지. 종말을 힘껏 막았던 거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았다. 이해를 포기하면 작은 희망이 어디선가 자라난다.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 초록색으로 변한 고기가 있다. 기원도 모르고 슬픔도 없는 고기. 그냥 계속 거기에 있었던 죄로 썩고 말았다. 그런데 이건 왜 말을 하는 거지? 나는 왜 냉동고를 열어 본 거지? 당장 얼려야 하는 것도 없는데, 숨기고 싶은 것도 없는데.

  “천천히 썩는 거지. 생각해 보면 큰 덩어리에서 떨어져나온 때부터 지금까지 썩고 있었던 거야. 몰랐던 거지. 넌 내가 결국엔 초록색으로 변하고 말았다고 생각하겠지만, 계속 여기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 확인하러 온 거지. 내일은 치울 거야, 계속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렇구나 이건 상상력의 힘으로 돌아가는 기계구나, 생각하면 이제 완전히 몸이 식어버린 내가 냉동고를 보고 있다. 근데 저거 가만히 두면 주변까지 썩게 하는 게 아닐까? 결국 이 모든 게…… 그러니까 이 모든 일.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이 모든…… 말 그대로 모든 게 결국 썩는 걸까? 저렇게 슬프고 축축하게 썩어서 결국 바싹 마른 검은 형체가 되는 거겠지. 운이 아주 좋아서 작은 버섯이 자랄 수도 있겠지만, 결국 버섯도 알게 되겠지. 이제 분해할 효소도 없는 새카만 것에 미래는 없다. 의미도 고기 파티도 없는 원형의 세계로 돌아가서 새로운 의미가 생길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일이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일어났다.

  ……그러나 고기는 영원불멸의 모습으로 썩고 있는 것 같다.

  “날 봐. 나는 이렇게 흉하게 썩어가는데도 즐겁잖아. 발이 있었다면 도망쳤고 입이 있었다면 비명을 질렀겠지만, 날 봐. 나는 쿨하잖아, 차갑잖아. 썩어가는데도 나를 잃지 않잖아. 그런데 나는 사실 조금 슬프다. 내가 삼겹살인지 목살인지 궁금해. 꽃등심이라도 되는지 모르겠어. 아마 나를 뒤집으면 나를 감싼 비닐에 붙은 바코드를 읽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얼어붙었어. 냉동고에 접착된 듯 단단하게 붙어있지. 나는 완전히 한국적인 음식도 될 수 있었고 이국적인 음식에도 쓸 수 있었을 거야. 아니면 태곳적 그대로 불에 구워 원시인 스페셜 메뉴가 될 수도 있었겠지. 내가 뭐였는지 모르겠어. 나는 나가고 싶지 않아. 날 먹으면 아플 거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아프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감정 없는 고기야. 근데 지금은 완전히 썩어서 슬픈 고기야. 네가 나를 소비자 유통기한 내에 소비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야. 하지만 그 전에, 이 모든 일 이전에 아주 강렬하고 긴 겨울이 있었다고 과학자들이 그랬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일을 상상하면 내 슬픔이라는 것도 조금은 견딜만한 것이겠지. 계속 썩을 순 없어. 언젠가 나도 내가 온 세계로 돌아간다. 나는 네 일부를 가져갈 거야, 이건 저주야. 나랑 같이 썩어서, 썩고 썩어서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썩어서. 결국 무의미의 슈퍼마켓으로 돌아갈 거야. 우리는 오븐에서 향긋하게 익어갈 때까지 다시 모든 영광을 돌려받을 때까지 여기 있을 거야. 너는 자꾸 문을 열겠지. 덕분에 박테리아는 냉동고에 틈입해. 영광의 그날이 가까워지는 거지. 그러니까 어느 날 내가 초록색으로 변했다고 너무 미워하지 마. 너무 슬퍼하지 마. 우리는 어차피 상온 보관이 불가능한 신선식품이야. 먹을 생각도 없으면서 사다 놓고 잊히는 상품이야. 오염된 세상의 빛이야. 나는 너야.”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고기에게 전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정말로 초록 고기에게 무언가 빼앗기고 만 것이 아닌지 문득 두려웠다. 초록 고기는 이 순간에도 썩고 있었다. 내일은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얼마나 오래된 생각인지 생각하는 것을 그만 생각하려고 애썼다.  

  냉동고의 문을 닫자, 여기가 아주 어둡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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