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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Apr 13. 2024

나 이런 거 잘 못해

  조카가 놀러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두 살 난 조카는 말이 서툴다. 조카는 나에게 이리 와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다들 웃었다. 조카는 나를 내 방으로 데려갔다. 조카는 문을 닫고 침대에 올라갔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알아서 올라갔다. 침대 머리맡에는 내가 읽다 만 책이 많았다. 조카는 책을 내밀었다. 조카는 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엄마는 책을 재밌게 읽어야 한다고 했다. 격양된 목소리로, 때로는 다정한 목소리로 해야 한다고 했다. 조카가 내민 책은 어린이가 읽을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조카는 읽을 줄 모르고, 아까 삼촌 죽었다는 장난에 까르르 웃는 걸 보니 죽었다는 말은 아는 듯하다.

  이건 안 되겠어. 이건 어떨까.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집어 들었다. 엄마가 그린 호랑이 그림을 보고 신기해하던데. 호랑이 이야기를 해주면 좋아할까. 자, 시작한다. 갑자기 모든 게 막막했다. 아이에게 부탁받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카는 나를 빤히 보고 있었고 방은 아주 조용했다. 나는 아주 건조한 목소리로 중반부를 읽어 내려가려다 실패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호랑이 한 마리와 한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았던 이야기야. 아니야, 그건 은유였고 사실은……’ 마음은 점점 뒤틀려갔다. 책 속의 고통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조카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한 구석에 쌓기 시작했다. 나는 그게 정말 다행이었다.

  조카는 집에 가고 나는 남았다. 책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내 방에는 엄마가 그린 호랑이 그림이 있다. 그것이 비스듬히 걸려있길래 수평을 맞춰보다가 그만 보고 말았다. 호랑이의 두 눈을. 호랑이가 나오는 책의 내용이 떠올라서 오늘은 호랑이 생각만 하겠군. 생각을 하게 되고.

  조카는 읽을 줄 모르기에 도움을 청하고. 조카는 왜 문을 닫았을까. 읽을 줄 모른다는 게 창피했나? 나는 읽을 줄 알아도 읽는 게 창피해. 너는 그러지 마. 너는 그래도 돼. 말을 하게 된다.

  점심에 끓인 국으로 저녁을 먹게 된다. 엄마는 조카가 어쩜 그렇게 많이 웃는지 신기해하고, 나는 조카를 웃겼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책을 읽어주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 침울하다.

  말이 서툰 조카에게 책을 읽어준다는 건 어렵고, 어차피 무슨 뜻인지 모를 게 뻔한데도 읽어야 한다는 건 이상하게 느껴진다. 몇 단어를 안다 해도 호랑이가 나오는 중반부터 듣는다면 책의 행간을 놓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내 목소리가 조용한 방에 울린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조카의 웃음기 띈 표정이 점점 무표정하게 바뀌면 생각을 하게 된다. 너는 정말 이야기를 사랑하는구나.

  식은 고기와 삶은 주꾸미, 김칫국과 밥을 함께 먹으면서 나는 말이 없었다. 말을 빼앗긴 듯도 하다. 조카에게 책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읽어줬더라도 조카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조카는 무엇이 하고 싶었던 걸까.

  그림 속 호랑이가 태연하게 걸어 나오는 꿈을 꿀 것 같다. “책에 나온 호랑이는 어떻게 되었지? 호랑이가 정말 나오긴 하나?” 호랑이가 내게 말할 것 같다. 그런 꿈을 예감한다.

  당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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