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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May 18. 2024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흐흥 귀여운 것들.”하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고 얼마 뒤 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바다를 향해 형의 등을 힘껏 민 사람은 그의 동생들이었다. 김승옥의 단편 『생명연습』을 읽고 얼마간 그 목소리가 맴돌았다. 직접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랬다. 흐흥 귀여운 것들. 흐흥.

  끔찍해서? 그건 아니었다. 끔찍하지 않다는 말인가. 끔찍했다. 형 어째서 살아 돌아온 거야? 흐흥 귀여운 것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형은 전쟁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형은 무엇 때문에 죽었나, 형은 어머니를 향한 살의를 억누를 수 없었다. 어머니가 집으로 남자들을 들였다. 형은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죽이자고 말하고, 동생들은 그런 형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고 그래, 형을 밀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동생들은 생각했다. 내가 끔찍한 기분이 든 이유는 바다에서 돌아온 형이 푹 젖은 채 말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읽은 두 편의 작품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에서 따라온 안개와 연기, 하얀 눈의 절망이 나란히 서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활이 열린다. 황폐함이 있다. 질서와 관습도 황폐해졌다. 전쟁 전에도 황폐한 질서와 관습이었을 것이다. 그런 걸 누가 다 지키겠어? 하고 말하고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정말 새로운 세상인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새로운 한국일까? 선뜻 모르겠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무너진 동네로 돌아와 판잣집을 짓는다. 이 층의 건물을 짓는다. 이 층의 건물(전쟁이 남긴 영향인가? 서구적인 건축인가? 이전엔 이 층의 건물이 없었나? 계급을 상징하는가? 모른다. 나는 잘 모른다. 황인찬의 시 ‘거주자’처럼 “의문은 이 층에 가로막히고”). 다만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잖아요, 황폐한 세상에 다시 살아보라고 툭 사람을 던져놓고. 빌어먹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머니 더, 더, 완전히 질려버릴 때까지.

  동생들은 필사적으로 어머니를 변호한다. 어머니의 애인들은 죽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정말 그런가? 그러나 동생들도 자신들의 말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가 왜 남자를 집으로 들이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이유는 즉석에서 만들어도 그만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머니는 집으로 남자를 들이면 안 될까? 아버지에 대한 추모 때문? 교육 때문? 집에 온 남자들이 아버지가 되어 주지 않기 때문? 시원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간신히 말한다면 “남자를 들여도 됩니다. 그런데 보기에 좀 그렇잖아요.” 같은 괴상한 말을 하게 된다. 조금 전엔 더, 더, 하고 외쳤으면서.

  그렇다고 전쟁이 ‘악습’을 끝내주었다는 말이 된다면 최악이다. 전쟁이 남긴 건 우울뿐이다. 우울. 정말 우울한 사람은 실없이 웃는다던데. 후훗, 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생명연습’이라는 제목은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짐작이 간다. “인간은 다면체”인 것이다. 전쟁은 우리를 정신적인 의미에서, 또 육체적인 의미에서도 파편화시켰다. 전에 없던 대량 살상이 그랬고 민족 분열이 그랬다. 유리창이 깨지고 나서야 창문이 다면체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이라는 곳도 “우리가 각자 들어가야 할 방”처럼 나뉘게 되었다. 튼튼하게 붙잡았더라면, 『서울 1964년 겨울』의 주인공인 ‘나’의 말대로 한방에서 잠들었더라면 우울한 남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울의 근원을 바꿀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었다. 『생명연습』이라는 소설은 ‘전쟁이 남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전쟁 이후 우리가 남긴 것’이라고 생각하려는 것 같다. 알고 보니 우리에게 욕망이 있었다, 같은 맹랑한 생각을 나는 했다. 창문은 다면체 조각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한 장의 유리로 태어난 것일까. 확실한 건 다면체는 이제 다면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기원을 모른 채 살아야 한다. 다면체가 된 인간은 당분간 연습 같은 삶을 살았다. 당분간이 아니었다.

  ‘머리카락부터 눈썹까지 전부 밀어버린’ 학생을 보고 소설 속 교수는 말한다. “극기?” 이 극기라는 말을 듣고 주인공은 어머니와 형의 갈등을 떠올리게 된다. 형을 설득하려고 쓴 누나의 편지에서 “어머니의 행동은 일종의 극기”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그런가. 극기에 불과한 것일까. 모두 자기 세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일까. 이런 질문과 나름의 대답 뒤에 형은 “흐흥 귀여운 것들.”하고 말한다.

  『무진기행』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처럼 제목을 붙여두고 『생명연습』 이야기만 했다. 『서울 1964년 겨울』까지. 김승옥 유니버스? 아니, 이 세 편의 소설은 극도로 우울한 장소에서 빠져나온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빠져나와 이른 곳은 어디인가? 다를 바 없다. 김승옥 소설가는 김승옥 유니버스 같은 이질적인 공간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깊게 스며든 습기와 같은 우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다면체’인 우리의 어느 한 부분은 반드시 늘 젖어있다.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은 장인어른 덕분에 전무이사로 임명된다. 마음이 어수선할 것을 염려한 아내의 배려 덕분에 그는 어릴 적 우울을 간직한 고향 ‘무진’으로 향한다. 그러니 무진이라는 곳은 한 번 생각이라는 것을 해봐도 좋은 곳이다. 안개가 특산물인 곳. 거기서 윤희중은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무진을 떠나는 버스에서 그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인숙이라는 여자 때문? 그의 부끄러움 또한 ‘다면체’다. 아마도 그는 생각이라는 것을 무진에 두고 오려고 한 것 같다. 잘 되진 않았나 보다. “당신은 무진 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이정표를 마지막으로 소설은 닫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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