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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Jun 08. 2024

이 새는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그거 말인데 좀 더 확실하게 해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자주 생각한다. 그렇게 ‘좀 더 확실히’ 무언가 반복하면 대부분 후회한다. 후회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두 팔로 엄마를 안는다든가, 피부 트러블의 원인인 햄버거를 시켜서 먹는다든가, 황인찬 시집을 처음부터 읽어본다든가 하는 일이 그렇다. 물론 허수경은 언제 읽어도 좋다. 황인찬만 말해야겠다. 『구관조 씻기기』만 말해야겠다.

  “정말 아름답지?”하고 나에게 말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공원 화단 앞에 앉아 있었다. 잘 가꾸어진 꽃을 보고 있었는데, 나는 꽃을 꺾어 내밀었다. “그렇게 아름답다면 가져.”하고 생각한 걸지도 몰랐다. 그 사람은 아연실색하고 나를 나무랐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가끔 멍하니 공기를 보다가 떠오르는 것이다. 꽃을 꺾는 사람에 대해서, 나란 사람에 대해서. 이제 꽃을, 특히 공익의 목적을 띈 모든 것을 함부로 다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하고 살고 있다. 나는 아직 은유적으로 꽃을 꺾는다. 그것이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다. 다시 그럴 것이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시집에 실린 첫 시는 「건조과」다. 말린 과일은 미래의 과일이라고 말하는 시다. 시집에서 처음으로 배치된 시는 특별할까? 첫 시는 시 세계의 안내문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고 중요한 열쇠처럼 다뤄지기도 한다. 어떤 경우엔 그냥 집필된 시간 순서로 엮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눈치껏 따라간다. 나는 미술관 바닥에 붙은 화살표를 얌전히 따라가거나 ‘정숙’이라는 단어가 붙은 공간에선 잠입 요원처럼 움직인다. 「건조과」라는 시에선 “향기가 난다”(「건조과」) 향기가 세 번이나 난다. 그러므로 도저히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를 향기로 알리는 이 물체는 쪼글쪼글한 표면을 가졌다. 뜨거운 물속에 담긴 과일에서 과육이 터져 나오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런 다음 “아무래도 말린 과일은 뜨거운 물속에서 더 오래 버티겠군.”하고 소리 내 말해보면 정말 그렇다는 걸 알게 된다. 여기까지 왔다면 왜 시에서 말린 과일을 미래의 과일이라고 불렀는지 물성의 영역에선 이해하게 된다. ‘건조한 사랑’이란 건 뭘까? 하는 영역까지 단숨에 점프하는 것도 좋겠지만, “신성을 망치지 마세요// 우리 밖에 쓰인 말을 따랐다”(「서울대공원」)라는 안내문을 따라가 보자. 그러면 내가 만든 말인 ‘건조한 사랑’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건조한 사랑은 한때 물기를 머금은 사랑이었겠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집을 읽다 보면 무언가 망치고 말았던 일이 계속 나온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구관조 씻기기」), 노인이 앞에 서면 불편하다(「서클라인」), “끌어내리듯 부르는 것이 나의 문제라고”(「낮은 목소리」), “처음에는 그저 토끼 한 마리를 잡고 싶었을 뿐이다”(「구원」) 등에서 화자가 어떤 실수를 범하자, 세계가 오작동하는 듯한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는 사실 알고 보니 어떤 신성함이나 규범, 아름다움, 너의 마음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억울하겠다.

  거기에는 어떤 신성함이나 규범, 아름다움, 너의 마음이 없다. 사실 망친 것은 없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 그렇게 거대한 것이 무너졌다면 보드게임 젠가의 아슬아슬한 조각을 잘 못 뽑은 섬세하지 못함이나 무지함이 있을 뿐이다. 섬세하지 못함이나 무지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죄를 덮어쓴 누군가를 계속 만드는 게 옳지 못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황인찬. 아아, 황인찬 시인은 내가 보기에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다. 광목으로 가린 두 눈에서 안광을 뿜는 사람이다. 엎드린 채 울고 있지만, 혼자 뭔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같다. 그의 시에서 화자는 뭔가 계속 먹고 마신다. 그게 뭐라고. 그게 뭐다. 그는 벚나무 아래에서 체리를 먹으며 “이걸 빛이라고 불러도 좋을까”(「X」) 생각한다. 문 안쪽의 기원을 향해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지”(「개종」) 묻는 그의 천연덕스러움은 놀랍다. 그의 시에는 억울한 순간에 차라리 깔깔 웃어버리는 사람의 유머 코드가 이식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다. 모든 수단이 사라질 때 그들은 마침내 웃는다.

  그렇다고 황인찬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가 죄스러움을 가장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겉으로는 눈물짓는다는 게 아니다. 그들은 망친 게 없음에도 죄스러움을 느끼고 아파한다. ‘상황’에는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원인’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은 억울함과 죄스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새장에 갇힌 새를 씻기는 시 「구관조 씻기기」를 이런 각도에서 보면 상당히 중요한 열쇠가 새장 안쪽에 떨어져 있다. 비가 올 전조가 없었던 거리가 젖어 있었던 이유는 아마 랩이나 비닐로 감싸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도서관 건물은 새장이 된다. 그렇다면 물은 안쪽에서 바깥으로 향한 것이다. 그렇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자신을 씻겼다. 아마 이것을 ‘용서했다.’라고 바꿔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떳떳함을 획득한 그들은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유독」) 웃음을 멈추면 슬픈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기에 더 그랬다. 죄를 짊어질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플라잉 더치맨 호에 선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세상은 그들에게 죄를 묻는다. 그들의 웃음이 멈출 때까지. 아카시아 향기를 무덤 냄새로 바꿔 부르는 유머에는 이런 비감이 들어있다.

  첫 시에 의미가 가득하다면 마지막 시엔 어떤 게 있나. 사실 ‘첫 시에 무언가 있다’는 내 유머였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눈물이 고였다. 마지막 시는 「무화과 숲」이다. 옛날 일이 되어 버린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화자는 쌀을 씻는다. 랩도 비닐도 없는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보면서.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라는 말에는 유머를 넘어선 거대한 울림이 있다. 그렇게 그는 눈을 감는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꾸면서. 그는 내일 아침 일어나 아침을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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