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산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해성 Jun 11. 2024

그대 내 슬픔의 레플리카

  “천국에 개들이 없다면 나는 개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 윌 로저스


   작은 개를 안아 들거나 큰 개를 힘껏 들어 올려 엉덩이를 받쳐 본다면 개들이 얼마나 축축한 입을 가졌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걸 아는 것은 인생의 큰 기쁨이다. 개들은 저항한다. 개들의 발톱은 세균 덩어리고 거기에 할퀸 자국은 쉽게 낫지 않는다. 반드시 흉터가 남는다. 개들은 경고한다. 개들은 새벽 세 시에 짖는다. 우리는 개들의 입을 막아보려 하지만 그들은 문명의 시작점 지평선 너머의 야성을 향해 짖는다. 그건 그냥 늦게 귀가하는 이웃이다. 개들은 허겁지겁 먹는다. 기억하는 것보다 오래된 습관이다. 개들은 미리 죽을 곳을 찾아둔다. 그곳은 대부분 우리가 애정과 약간의 짜증을 담아 끌어내던 집의 음지다. 우리는 그곳을 허락한다. 이게 우리 심장에 공간이 생기는 이유다.

  엄마는 우리 개와 똑같이 생겼다면서 DIY 그림 하나를 주문했다. 엄마는 집중했다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기에 그림은 며칠 만에 완성되었다. 정말 그건 우리 개의 초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했다. 어쩌면 같은 색의 같은 종을 가진 개는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나 또한 자신이 없다. 개를 다시 만났을 때 개가 나를 향해 뛰어오르지 않는다면 어쩌지? 비슷한 개들이 모여 앉아 혀를 빼 들고 나를 보면 나의 개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의문은 고작 그림 한 장에 가로막힌다. 회화 세계로 들어간 개는 말이 없다. 죽은 개도 말을 하지 않으니 나는 말 없는 세계에 갇히고 말았다. 엄마에게 말했다. 그 개가 했던 행동들을 전부 기억하세요? 엄마의 기억은 마치 모든 개의 행동양식을 포용하는 것 같아서 믿음이 가지 않는다. 물론 내 기억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대한 기억이란 한 마리 거대한 생선을 사이좋게 나눠 먹는 초밥집 같은 것이다. 그들을 다시 한 자리에 불러 모으는 것만큼이나 죽음 이전의 회고는 어렵다. 그럴 때 우리는 시각 정보에 의존하는 것인데.

  이제 죽음의 레플리카는 내 머리맡에 걸려있다. 죽은 혀를 빼 물고 허공의 죽음 입자를 보는 눈을 하고 있다. 나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있었다. 어떤 지독한 유월이었다. 일부러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서 출근하곤 했다. “주문하시겠어요?”, “테이크아웃인가요?”, “영수증 드릴까요?” 그런 질문에 고분고분 상냥하게 대답한다. 카페라테 따뜻한 걸로요. 가져갈게요. 필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게 하루의 전부가 되기도 했다.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그런 일도 곧 완전히 질려버렸다. 죽고 싶지 않았지만(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죽음을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예비하지 않은 장마가 북상하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과 비슷했다.

  죽은 나의 개 때문에 죽고 싶었던 게 아니다. 나는 명랑하다. 나는 내 손으로 나의 개를 죽였다. 내 선택이었다. 개는 가망 없이 아팠고…….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죽음의 내용에 대해서 생각했다. 손에는 희뿌연 커피가 든 컵이 들려있었고, 개의 죽음에 대한 가책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죽음의 레플리카는 점점 생기를 띄는 것 같았다. 그래, 정말 우리 개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잖아. 나는 진품의 죽음을 가졌는데, 왜 레플리카 따위가 필요하겠는가. 너는 죽음의 이름을 벗어라. 그대 내 슬픔의 레플리카. 너를 생각할 때 나는 슬픔을 내 방식대로 다룬다. 다시 유월이 시작되었다. 나는 키오스크를 애용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새는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