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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Jun 26. 2024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모든 일은 휴가에서 시작되었다. 양떼목장을 천천히 걸으며 양이나 소를 구경했다. 양치기 개는 없었고 양치기 소년도 없었다. 단 하나의 거짓말만 있었다. 익히 들어 알듯이 양치기 소년은 거짓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양치기 소년은 진실 속에 죽었고.

  수학여행을 온 애들이 버스에서 울컥 쏟아져 나온다. 네가 나를 보고 “너는 마지막까지 양보다 사람을 보러 온 것 같아.” 하고 말하면 웃음이 나왔다. 웃을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직후의 일이었다.

  여긴 햇살이 뜨겁구나, 모자를 빌려줄까? 바람이 차다. 점퍼를 벗어줄게. 내가 말해도 너는 듣지 않았다. 너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걸었다. 양치기 개처럼 먼 곳 어디를 응시하면서 그랬다. 실제로 너는 여기로 오는 버스 안에서 잔뜩 긴장해 있었다. 설핏 잠에 들었다가도 반짝 깨어나서 주위를 살폈다. 네가 아직이냐고 물어오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대답해 보기도 했다. 여기가 어딘지 잘 몰랐지만.

  나는 왜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을까. 양을 몇 마리 잃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정답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구도를 잡는 사람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고, 뭐가 그렇게 웃긴 걸까. 나는 그것을 가만히 보았다. 타이머에 맞춰 무리 속으로 뛰어가는 사람과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은 높고 찬 바람에 정지 비행하는 매처럼 굳어있었다. 잠시 후 뭐야 동영상이잖아, 모두가 다시 소리 높여 웃었고.

  너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오후의 빛이 목장에 내리쬐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눈이 부시고 눈물이 난다. 외눈을 뜨고 너를 찾아보지만, 보이는 것은 울타리 가까이 모인 양들과 양을 세는 것처럼 졸고 있는 어떤 노인뿐이었다.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노인은 대뜸 말한다. “양이 아주 많죠. 양이 한 마리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겁니다. 딸아이가 아이를 낳았어요. 솜뭉치 같던 애가요. 아직 걔는 솜뭉치에요. 오늘 양을 잡을 겁니다.” 나는 짐짓 놀라 관상용으로 키운다고 생각했어요, 하고 말했다. 노인은 나를 의뭉스럽게 보았고, 나는 이 모든 것이 양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노인은 길을 따라 올라갔다.

  여행객들은 이제 내려가는데, 한 아이가 멈춰서 고백을 한다. 메에에, 갑자기 나올 것 같은 비명을 꾹 참고 말한다. 정말 어설프고 이상한 고백이야, 그렇게 느껴졌다. 미안하다는 대답을 듣고 아이는 양을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멈춰있다. 누군가 흘러내리는 노을을 찍고 있는데, 구도를 보니 그 아이가 찍혔을 것 같다.

  멀리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다 웅크리는 다른 아이가 하나. 양 한 마리가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핥고 있다.

  양들은 여행객과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오늘 저 아이 중 하나가… 아냐 생각하지 말자. 더 좋아지려고 여행을 왔잖아. 너는 어디로 간 걸까. 키클롭스의 동굴에서 탈출할 때 오디세우스가 양의 밑에 달라붙어 빠져나왔던가. 배를 가른 양의 속에서 작은 양이 나온다면 웃기겠지. 그건 웃긴 일이 아니었다. 상처 입고 놀라 도망친 양이 양 떼 사이로 숨으면 금방 들킬 거야. 누가 나에게 검붉은 양이 이쪽으로 오지 않았냐고 한다면 나는 손가락으로 양을 가리킬 거야. 내 두 뺨이 붉겠지.

  사람도 양도 사라진 목장의 풍경은 모든 것이 멈춘 것 같다. 컴퓨터 배경 화면에 이런 풍경이 있었던가. 두 눈을 가린 궁금증을 자른다. 양치기 소년은 죽지 않는군. 죽은 것은 양이었어. “미안해.” 그것은 내가 보낸 말이었고 “어디야. 전화 좀 받아.” 너는 그렇게 시작되는 말을 하고 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너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한다. 양떼구름이 창밖으로 지난다. 그것을 두 눈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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