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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Jun 30. 2024

강낭콩은 식탁을 계속 구른다

  엄마와 앉아 강낭콩을 깠다. “배고파 죽겠네.” 말한 것은 영화에 나오는 군인이었다. 군인은 진흙을 밟고 자꾸 미끄러지려 했다. 영화엔 구덩이에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장면이 많았다.

  강낭콩은 의외로 하얗구나, 강낭콩을 비틀면 가끔 보라색 강낭콩이 나오기도 했다. 썩은 것은 골라내라는 말을 들었다. 썩은 것은 없었다. 이건 보라색인데 괜찮은 걸까. 엄마는 괜찮다고 말했다. 명료한 대답이었다. 엄마는 늘 그랬다.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면 엄마는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지 할 것도 아니었군. 엄마의 명료한 대답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명료해졌다.

  엄마랑 같이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엄마는 언제나 씨앗만 남은 천도복숭아를 뱉었다. 나는 아무리 열심히 먹어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깡통에 든 베이크드 빈즈를 스파게티 소스와 함께 뭉근히 끓인 뒤 핫소스로 간을 맞추면 빵에 찍어 먹기 좋다. 취향에 따라 다진 고기나 양파, 치즈 등을 넣어도 좋다. 뭘 넣어도 결국 스파게티 맛이 난다. 베이크드 빈즈는 부대찌개의 재료고 부대찌개는 군부대와 관련된 음식이라는 말이 있다. 음식의 기원을 모른 채 먹어도 맛있는 건 맛있듯이 인생도 그럴까, 인생이 뭔지 모른 채 살아도 괜찮은 걸까. 의문이 들 때면 최대한 명료한 대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엄마처럼. 그러나 그런 건 엄마도 몰라, 몰라서 인생은 그냥 삼켜도 좋은 걸까. 혀끝에서 녹여 먹는 걸까. 강낭콩을 까다 보면 배고파진다.

  죽지 않기에 산다는 건 죽지 못해 산다는 것과 다르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에는 절망이 들어있으나 죽지 않기에 산다는 말에는 희망이 들어있다. 물론 희망은 때에 따라 독소가 되기도 한다. 강낭콩은 생으로 먹으면 독이다. 반드시 익혀 먹어야 한다.

  추락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엔 놀이터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이 많았고, 나도 몇 번인가 뛰어내리곤 했다. 죽지 않을 뿐, 다치지 않는 높이가 아니었기에 다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치는 높이란 건 애초에 없을지도 몰랐다. 우리가 가끔 돌부리를 차고 넘어질 때 머리를 다치는 건 우리의 머리가 우리의 키만큼 지면과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또 다친다는 건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인데, 그때는 그런 걸 몰랐다. 이번에도 다치지 않고 착지했다는 안도감과 이번엔 다칠 수도 있다는 불안이 떨어지는 행위에 독특한 맛의 재미를 더했다.

  아마 우리의 사랑과 싸움과 새벽 두 시의 배고픔과 망친 요리 같은 일련의 추락 행위는 우리를 다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배는 여전히 고프다. 저러다 다칠 텐데, 영화 속 군인은 적군의 사격을 피하며 어두운 거리를 뛰어갔다. 군인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했다. 강낭콩은 한 봉지 가득 나왔고, “우리의 일용할 식량이야.” 말한 것은 엄마였다.

  군인은 어쩔 수 없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갈증과 허기가 이 영화의 중요한 테마 같았다. 나는 이것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강에 떨어진 군인은 헤엄치고 달려 명령을 완수했고, 계속 살아있기로 마음먹었다.

  강낭콩을 열면 강낭콩이 있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그런 것들이 너무 심심했다. 그러나 창밖은 거리를 적시는 비가 떨어지고 있었고 어디선가 작은 추락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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