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제일 무서워 미룬 이들에게

시험은 인생의 연속, 시험이 뭐라고 미루니

by 늘여름

익숙하다는 감각의 힘은 무섭습니다. (한 번 더 보라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빠진 게, 놓친 게 그렇게나 잘 보입니다. 회사원의 자아로서는 실수가 두렵습니다. 업무와 다르게 시험의 장점은 (마음껏) 틀릴 수 있다는 겁니다. 주어진 답 내에서 여러 방식의 문제 풀이 접근법을 허용하기에 사고가 트이는 듯합니다.


원하는 방식으로 학습할 수 있어서 마크다운에 글로 정리도 해봅니다. (벨로그에 올리는 날을 꿈꾸며) 코드레벨로 구현하거나 구글링으로 만난 남이 짠 소스를 뒤적거리며 깃허브 레포 메인 브랜치 커밋을 칠 만한 정도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곤 합니다.


4월은 마감과 거래처 회의, 중간고사 기간이 너무나도 친했습니다. 적당히 가까워야 살 텐데 뗄래야 뗄 수 없게 근접합니다. 덕분에 밀린 시험공부로 주말은 늘 도망갑니다. 어깨에 긴장감을 풀고 살기에는 (왼쪽 눈 주변 근육이 파르르 떨릴 만큼) 눈가부터 압력이 잔뜩 들어가 있습니다.


어느 날은 툭 화내고 다음날은 있는 힘껏 웃으며 바쁜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삶에 중요한 걸 챙기다가 밀려난 것들을 통해 알게 된 미룸의 미학과 처리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려고 돌아왔습니다.

벼락치기는 적성에 안맞아 그때그때 조금씩 공부하다가, 시험 직전주 배운 내용 복습을 미루고 전날 Claude AI와 같이 봤는데 중간고사 문제로 나왔답니다.(@경경수의 개발만화)


짧은 하루에, 여러분은 무엇을 먼저 고르고 어떤 것을 미루고 계신가요? 저는 에너지가 덜 드는 일에 힘을 두지 않는, 시작만큼은 무서워하지 않는 미룬 이입니다. 제 일상에 루틴이나 이벤트에 진심을 쏟다 보면 그 밖의 것들은 장애물처럼 느껴집니다.


딜레이 리스트

1. 강의평가, 의무교육 등(충분한 기한의 다소 쉬운 것)

2. 건강검진(단, 간헐적으로 아프면 병원은 즉시 방문)

3. 버즈와 소니 헤드폰 충전(줄 이어폰으로 대체 가능)

4. 말차 끊기(언제가 될지 모르나 질리면 안 찾을 예정)


그 밖에도 데스크톱과 복합기를 연결하는 선 새로 사는 걸 1년 넘도록 미뤄서 프린트샵으로 인쇄하러 가곤 합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별 걸 다 미룬다 싶겠지만 모든 일에 공을 들이면 기대에 못 미칠 때 려오는 불안을 예방하기 위한 기제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안 해서 지나가는 기회는 제 것이 아니니까요. 해볼걸 하면서 후회하기에는 일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글 쓰고 책 읽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보냈을 경험이 남았으니 아쉽지 않습니다. 제가 선택해서 쌓아온 시간은 저에게 남았기에 미룬 점보다 해낸 점이 저를 설명해 준다고 믿습니다.

선물받은 말차 케이크, 같은 파트 달고마(고구마무스치즈 떡볶이) 점심입니다. 식사로 환기시키고 다시 일로 돌아가면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말차피플과 마라샹궈를 곁들인 저희 실장님이 주신 맵닭발, 클로버님과 먹다가 코피나는지도 몰랐던 뿌링클과 치즈볼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 그토록 중요하다고 여겨서 에너지를 쏟아붓고 계신가요? 일상 루틴으로 구성된 것부터 철저히 의도된 일까지 무궁무진합니다.


킵고잉 리스트

1. 출근, 등교와 가는 길가의 카페에서 커피 테이크아웃

2. 주말 운동(토, 일요일 이틀, 헬스와 러닝 모두)

3. 예적금 재예치, 신규 적금 가입(예: 등록금 납부 용도) 등 모이는 돈에 꼬리표 붙이기

4. 수업 복습(복습이 끝나도 주말이면 예습까지)

5. 브런치 글 초안 쓰기(재미가 없어서 못 올리더라도 조금씩 써서 모은 문장 이어 보기)


"시작이 제일 무서워서, 지금이 완벽하지 못할까봐, 일단 내일의 나에게 미루지는 않으신가요?" (이제규, 2024. [미룬이] 노래) 여러분이 보시기보다 저는 실행력이 좋은 편이라 겁도 없이 시작을 잘합니다.


사전에 준비하면서 행동이 늦어지는 걸 선호하지 않아서 형편없어도 그냥 합니다. 계획대로 흘러가주지 않는 인생을 앞두고 해 봐야 제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걸 마주 보는 데는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출발하는 힘의 원천은 정신적, 시간적 마감기한에서 나옵니다. 여러 책에서 괜히 과업을 잘게 쪼개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심리적 부담을 내리기 위함도 있지만 저에게는 일의 실체에 대해 뜬 구름을 걷어내고 명확하게 하기 위함이 더 큽니다.


막상 별게 아닐 때도 있고요, 해보면 그다음에는 연달아하게 되기 때문에 하기 싫은 감정과는 별개로 계속 쌓여서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학부 시절에 이어 석사 과정 중인 지금도 시험공부를 미루지 않는 습관도 이런 동기에서 나오곤 합니다. 그러니 시간의 누적이 보이는 방식으로 규칙을 정하는 걸 추천드립니다.


다만, 중간 지점까지 달려오면 초심만으로는 지속력이 부족해지는 시점이 오고요, 그 순간이 꽤나 오래도록 무섭습니다. 마무리를 잘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끝을 맺는 경험을 무한히 반복해 봐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원해서 하고 있는 일에서 (어렵지만) 데드라인에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와중에 회사에서 클로버님과 한 번 더 협업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드리머님도 합류해서 더욱 기대가 됩니다. (이번 공동 과업을 하기 전에 드리머님이 꾼 꿈이 기억에 맴돌아 이렇게 필명을 짓게 되었답니다.)


제 장점인 일단 시작해서 구체화시키고 실행의 단계로 끌고 오는 데까지 진행했습니다. 다들 적극적이라서 걱정보다는, 이 기회에 업무를 끝내는 그 순간까지 어떤 방식과 태도로 임할지 스스로를 집요하고 치밀하게 관찰해보려고 합니다.

교안이 영어여서 수식이나 기호 빼고는 필기라도 한글로 하는데요,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무슨 말이지', '근데 이건 왜 중요할까'라는 끄적임이 늘어갑니다.


프로 미루니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보니 글도 길어지고, 인용도 늘어난 듯합니다. 그래도 저는, 여러분이 정말 하고 싶은 일과 그걸 위해 꼭 해야 하는 일만큼은 미루지 않는다면, 다른 것들은 조금 늦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5월은 대구에서의 대학 동기 결혼식과 직장 동료와의 춘천 러닝 행사가 있는 기말고사 준비 기간입니다. 여름 방학을 기다리기보다는 지나가는 봄날 아쉬움 한점 남지 않도록 매일을 즐겨보겠습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속도로, 이 봄을 마음껏 채워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최희진은 자가면역 질환자였고, 루푸스가 심장에 침범해 태어나서 얼마 안 돼 성인이 될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른까지 살아냈다. 이것만으로도 최희진은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간헐적으로 슬프고 억울할 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적당한 때에 죽음이 자신에게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녀에게 딱 맞는 시기에.

수영은 희진의 단호함에 떠밀려서 첫 해외여행을 시작했다. "가봐. 가서 마음껏 보고 느끼고서 원고 써." 수영은 망설였다. 희진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불안했다. 하지만 희진은 엄한 얼굴로 말했다. "넌 네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해. 그때 그거 했어야 했다고 나중에 후회하고 싶어? 난 그런 후회에 핑계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

세상일은 어떤 방식으로든 쉽게 풀리지 않았다. 완전한 행복은 먼 일이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 조현선 작가님, <나의 완벽한 장례식>
뒤가 막혀있으면 무조건 그때까지 일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을 10년 이상의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어쩔 땐 결과물이 같고, 심지어 세 시간 동안 한 일보다 마감을 두고 한 시간 만에 해치운 일의 결과가 더 나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 20분이라도 써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글들을 모아 열 줄의 대사로 만들었습니다. 하루 20분씩 쓴 글들이 ⋯ 책으로 출간되었고, 수많은 강연 자리와 ⋯ 드라마 작가로 데뷔할 수 있는 시초까지 되어주었습니다. 5년 후, 또는 10년 후 내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하루에 한 시간이 차고도 넘치는 시간이라는 것을 꼭 말하고 싶습니다.

- 최유나 작가님, <마일리지 아워>
토요일 연재
이전 28화(황)금요일에 오는 보상 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