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세계를 선택하고, 수용으로 그 이전을 기억하는 것에 대하여
어느 순간부터 나는
같은 감정, 같은 관계, 같은 질문을
늘 같은 얼굴로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글은 그 반복을 바라보는 위치에 대한 이야기다.
이 반복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어딘가에서 멈춰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보통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믿음은 진실을 향해 가는 과정이고, 수용은 그 믿음 이후에 도달하는 상태라고.
하지만 이 둘은 순서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과 수용은 전혀 다른 층위에서 작동한다. 진실은 믿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믿음은 도달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경험의 경로를 통과할지를 고정시킨다.
믿음에는 항상 가능성이 있다. 반대가 존재하고, 선택의 여지가 있으며, 그래서 유지하려면 에너지가 든다. 믿음은 마음이 무언가를 붙잡는 구조이다. “믿어야 해”, “흔들리면 안 돼”, “의심하면 무너져” 같은 문장들이 따라붙는다. 즉 믿음은 아직 분리된 상태에서 진실에 닿고자 하는 마음의 시도다. 그래서 그 안에는 종종 의지와 억지가 섞인다.
수용은 전혀 다르다. 설득이 필요 없고, 반대도 없고, 유지할 필요도 없다. 수용은 알아차림에 가깝다. 비유하자면 믿음은 "태양이 뜰 거라고 믿어"라고 말하지만, 수용은 "아, 이미 떠 있네"라고 말한다.
수용은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음’에 가깝다.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허용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누군가가 말해줄 때가 아니라 저항이 멈출 때 스스로 드러난다.
그래서 진실에겐 믿음이 작동하지 않는다. 믿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고 믿지 않아도 영향을 준다. 중력이 내가 믿든 말든 작동하는 것처럼.
오히려 믿음은 진실을 향한 통로가 아니라 진실을 가리는 필터가 될 수 있다. 누군가가 “이게 진실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개념이 되고, 개념은 믿거나 거부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하지만 진실은 설명으로 오지 않고, 설득으로 오지 않고, 증명으로 오지 않는다. 오직 경험으로만 알아차려진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에 대해 '믿는다'가 아니라 '수용한다'라는 말을 쓴다.
우주의 법칙에서는, 이 세계가 내 마음을 되비춰주며 내가 믿는 것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내가 진실이 아닌 것을 믿고 있다면 나는 진실이 아닌 세계에 살고 있는 걸까?" 이 질문의 핵심은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는 가에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의 구조다. 태양이 뜨고 지며, 중력은 작동하고, 생은 발생하고 소멸하며, 의식은 경험을 한다. 이것들은 믿음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반면 변하는 것은 인식의 구조다. 내가 무엇을 보느냐, 어떤 의미를 읽느냐, 같은 사건을 어떻게 경험하느냐, 무엇을 ‘현실’이라고 느끼느냐. 바로 여기서 믿음이 작동한다.
"믿는 대로 보인다”는 말은 현실이 새로 생성된다는 뜻이 아니다. 경험의 해석과 체험의 질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같은 비를 보면서 어떤 이는 “망했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축복이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그냥 비다”라고 말한다. 비는 하나지만, 현실로 체험되는 세계는 다르다. 믿음은 우주를 바꾸지 않는다. 다만 내가 통과하는 세계의 결을 바꾼다.
그렇다면,
"내가 믿는 대로 현실이 펼쳐진다"는 말, 혹은 "내가 나의 현실을 끌어당긴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더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나의 믿음에 맞춰 경험의 경로가 열린다.
“나는 버려진다”를 믿는 사람은 관계 속에서 그 신호만 포착하고, 결국 그 경험을 확증하는 선택을 한다. “나는 안전하다”를 수용한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반응을 하고 다른 결과의 문을 연다. 우주는 믿음을 증명해 주려는 게 아니라, 나의 상태에 맞는 장면을 통과하게 할 뿐이다. 그 장면이란, 내가 주목하고 선택하며 반응할 수 있는 가능성들의 범위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다. 믿음은 진실을 만들지 않지만 경험의 반복 패턴을 만든다.
믿음은 인식의 렌즈다. 렌즈가 같으면 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우리는 다시 말한다. "역시 내 말이 맞았어."
그러나 이 확신은 우주가 증명한 결과가 아니라, 내가 보고 반응하고 선택한 방식이 다시 나에게 되돌아온 흔적에 가깝다. 이 과정은 나의 믿음과 신념이 계속 같은 자리를 지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우리는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단정 짓는다. 하지만 더 정확한 말은 의식이 스스로 놓여 있는 자리를 확인해 가는 하나의 순환이다.
믿음의 층위에서는 “사랑이다 / 아니다”라는 경험들이 계속 갈라진다
수용의 층위에서는 경험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바탕이 드러난다. 수용은 경험을 바꾸려는 단계가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바닥을 인식하는 단계다.
우리는 믿는 대로 경험한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생각과 신념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 믿음들은 진실 그 자체는 아니다. 믿음은 경험의 세계에서 작동하고, 수용은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자리를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세계를 선택하고, 수용으로 세계 이전의 자리를 기억한다. 진실은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붙잡고 있던 것이 풀릴 때 그 자리에 남는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세계를 살 것인가”를 묻는 단계를 지나
“세계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고 있다.
나는 경험을 만든다.
하지만 경험 이전의 바탕은 만들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믿음과 수용은
서로 부정하지 않은 채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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