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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Sep 08. 2023

<야구소녀>의 꿈

꿈을 향한 우보천리

함께 배드민턴 레슨을 받는 중학생 J. 스매싱을 몇 주째 반복하는데 정타를 때리지 못하자 코치에게 야단을 맞았다.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만다. 레슨이 끝나고 공을 주우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서두르지 마. 넌 뭘 해도 이제 시작일 뿐이야. 


우보천리(牛步千里) : 소의 걸음으로 천리길을 걸어간다. 


최윤태 감독의 "야구소녀(2019)"를 보면 그야말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는 주인공 주수인(이주영)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국내 최초 여자 야구고교생이라는 신화는 점점 퇴색해 가고 있었다. 리틀야구시절부터 중학교까지는 동기 남학생에 비해 체격도 실력도 월등했던 주수인이지만, 고교야구에서부터는 피지컬이 지배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항상 자기보다 뒤에서 겨우 따라오던 친구 정호가 프로구단에 입단하게 되자 수인의 절망은 더해간다. 거기다 어려운 형편에서 야구만 바라보던 큰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엄마(염혜련)의 고민은 깊어진다. 어느 날 코치로 부임한 최진태(이준혁)는 주수인에게 거친 직설로 야구를 포기하게끔 만든다.



여자축구가 있는데 여자야구는 왜 없지?라는 생각은 다음 첫 자막에서 설명으로 해결된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부적격 선수로 분류됐다. 1996년, 규약에서 이 문구가 사라진 뒤 여자도 프로야구 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프로야구 선수를 꿈꾼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겨울 해 질 녘 분위기의 쓸쓸함을 안긴다. 하루종일 고된 운동을 마치고 석양에 비친 긴 그림자 마저 지쳤는데  집으로 들어오면 가족을 부양하는 고단한 엄마가 밥을 차린다. 인생의 무게가 힘겨운 엄마는  오늘도 바른말을 던진다.

"안 되는 걸 알면 빨리 포기해야 돼. 안 되는 것 붙잡지 마. 네 아빠를 봐라...."


선천적으로 체력조건이 스포츠를 지배하는 건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이제 세계육상은 탄력과 피지컬이 남다른 아프리카계가 휩쓸고 있다. 미국 프로농구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백인들이 아직 우위를 점하는 종목은 테니스다. 특히 유럽출신들의 육중한 근육은 우리가 따라가기 어렵다. 요즘 우리나라의 정현 선수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그래서 박수받을 만하다(물론 정현 선수의 피지컬은 매우 양호하다). 하지만 삼십 년 전에 동양인이 세계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힘과 기술에서 그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1989년 그런 테니스계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난다. 바로 장덕배(張德培)씨(?), 대만계 미국인 마이클 창의 프랑스 오픈 경기다. 강력한 우승후보 이반 렌들과의 16강전에서 그는 2세트를 내려 내줬다. 패색이 짙은 그가 질질 끄는 수비형 작전으로 힘을 빼면서 지공을 펼쳐 2세트를 힘겹게 따냈다. 마지막 세트, 결정적 위기상황에서 마이클 창의 재치가 드러났다. 이름하여 언더서브 사건이다. 남자테니스는 퍼스트 서브에서 90%는 점수를 낸다. 강력한 서브로 우선권을 잡고 그다음을 공략하는 건 정석이다. 그렇기에 강서브를 기다리는 이반 렌들에게 마이클 창은 갑자기 레슨 때나 볼 수 있는 언더서브를 날려 이반 렌들의 허를 찌른다. 그리고 이반이 무너졌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마이클 창은 승승장구하여 당시 세계랭킹 선두였던 스테판 에드베리 마저 결승에서 역전으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의 나이 만 17세였다.


윔블던의 기적을 일군 마이클 창


"불가능은 없다"라고 나폴레옹이 말한 것을 나는 별로 믿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알고 보면 구린 점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현실적으로 불가능은 넘쳐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속담에 나도 동의하는 편이다. 그런데 떡잎이 잘 자라다가 중간에 가시덤불을 만나 더 이상 자랄 수 없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동갑내기 정호는 늘 수인보다 뒤처졌지만 결국 프로입단에 성공한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사실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꿈을 좇는 젊은이들에게 이게 꾸어 마땅한 꿈인지 헛된 꿈인지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든다. 그리고 많은 관객은 엄마의 라인에 서게 될 것이다. 야구는 취미로 해라... 이제 그만해라...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은 그래서 큰 복이다. 참된 스승은 일단 제자를 맡았으면 어떻게든 키워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사람들은 대개 단점만을 부각해서 보려고 한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특히 안절부절못하면서 험한 세상에서 고생할까 노심초사한다. 주수인도 약해져서 엄마가 말하는 공장에 취업도 하지만 그의 장점을 찾아준 코치 덕분에 뜻밖의 도약을 하게 된다. 


“단점은 잘 보완되지 않아. 단점을 극복하려면 장점을 키워야 돼. 너는 지금까지 남자들처럼 던지려 하니 안된 거야. 직구는 속도에서 이길 수 없어. 이젠 너의 장점인 회전력을 키워야 돼.  바로 너클볼이야."


너클볼이란 투수가 던진 공이 거의 회전하지 않아 홈플레이트(home plate)에서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는 것을 말한다. 홈플레이트 부근에서 떨어지거나 휘어지는 등 불규칙적인 변화를 일으켜 타자들이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주수인


결정적인 순간, 그녀의 너클볼은 성공할 것인가.



비단 젊은이들 뿐 아니라 꿈을 상실한 지 오래된 중년들에게도 이 영화는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단지 '성취'했느냐의 여부를 떠나 삶의 방식에서 우리는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반성해 보게 된다. J는 배드민턴 선수를 꿈꾼다. 사실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늦지 않았다. 이제 열네 살인데. 


80년대식 신시사이저 음악이 몽환적인 배경음악으로 깔리면서 그녀의 변화구가 글러브를 향해 돌진한다. 그러면서 관객에게 속삭인다.


 "꿈은 배신할지 몰라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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