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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Aug 23. 2023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이름

다시 찾은 우리들의 정체성


'늪의 바닥'역으로 향하기 위해 기차를 타는 센


센(千)이 탄 기차가 ‘늪의 바닥’ 역을 향해 바다를 가르고 질주한다. 왜 기차의 이름이 중도(中道)이고 종착역의 이름이 ‘늪(沼)’의 바닥일까. 중간에 늪의 벌판이라는 뜻의 소원(沼原) 역도 지난다. 센이 향하는 곳은 인생의 깊은 골짜기, 죽음의 기운조차도 힘을 내지 못하는 곳이다. 그녀는 왜 그곳을 향해 가는 것일까. 어려움에 빠진 부모님과 사망의 기로에 놓인 하쿠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다. 



어릴 적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다. 시장통 뒷길 주택가로 호기심에 걸어 들어갔었는데 잠시 후 사방을 구분하지 못했다. 방향을 잃다 보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고 계속 갈수록 더욱 낯선 광경만 펼쳐졌다. 새파랗게 겁에 질린 나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어떤 아저씨가 왜 우느냐고 물었고 나는 길을 잃었다고 했다. 집이 어디냐고 해서 시장 쪽이라고 했더니 방향을 알려주셨고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고 했다. 진짜 백 미터만 걸어갔더니 시장이 보였다. 그 순간의 안도감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2002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대상인 황금곰상과 2003년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등을 수상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레전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오랜만에 정주행 했다. 역시 감독의 나이에 가까울수록 작품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애니메이션이 담고 있는 각종 비유와 무의식과 음악의 앙상블에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대가의 손길이 닿은 장면마다 주체할 수 없는 감흥이 일었고, 그의 독특한 정신세계가 펼쳐놓은 신비함 속에 사로잡혀 센과 함께 나도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행방불명이라는 뜻의 일본어인 가미카쿠시(神隱)는 단순한 사라짐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감춰졌다는 뜻으로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4차원의 세계로 빠진 경험으로 표현하면 적당할 듯하다.



영화는 치히로의 가족이 이사를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웃집 토토로”에서도 이사 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치히로의 가족은 좀 더 유복해 보였다. 비포장 도로 앞에서 머뭇거리던 치히로의 아빠는 이내 “사륜구동이라 괜찮아”라며 더 속력을 냈다. 아우디 마크가 선명한 자동차 뒷자리에 누워있는 치히로는 슬프다. 분명히 이사는 부모님의 결정이었고, 치히로는 내내 떠나는 것이 못마땅했다. 아빠는 치히로가 다니게 될 학교가 보인다고 흥분했지만 치히로는 옛날 학교가 더 좋다고 응수했다. 이 장면은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잠시 후 막다른 터널 앞에 차를 세우고 엄마와 아빠는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치히로는 가지 말라고 소리치다가 할 수 없이 따라나선다. 터널을 통과한 후 펼쳐지는 기이한 풍광은 쓸쓸하고 스산했다. 아빠는 버블경제 이후 망해버린 도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이어 엄마아빠는 아무도 없는 식당에 차려진 음식을 주인 허락도 없이 먹기 시작하는데...



극 중에서 치히로는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인다. 부모님께 응석깨나 부리는 아이지만 의외로 속은 깊은 아이다. 마법에 걸려 돼지로 변한 부모님을 보고 어쩔 줄 모르던 치히로는 그때 나타난 하쿠라는 소년의 인도에 따라 길을 나선다. 도착한 곳은 마녀 유바바가 경영하는 대형 온천장으로 800만 명의 신들이 피로를 푸는 곳이었다. 인간은 출입금지인 그곳에 잠입한 치히로는 하쿠가 안내한 대로 온천물을 끓이는 가마 할아버지를 만나 일자리를 달라고 요청하고 결국 승낙을 얻어 주인 유바바를 찾아간다. 유바바는 계약서에 치히로의 이름을 지우고 센이라는 글자만을 남긴다. 마녀는 이름을 바꿈으로써 정체성을 빼앗으려 했다. 



온천장은 거의 15층 정도는 돼 보였다. 언젠가 가보았던 온천호텔 료칸은 실제로 이 영화를 연상케 했다. 지하의 욕탕을 찾아 걸어 내려가는데 거의 지하 4층까지 복도가 이어졌고 곳곳에 마련된 비슷한 욕탕입구는 미로 같았다. 나무로 만든 계단은 어둠 속에서 삐걱거렸고 음산했다. 알 수 없는 모험심이 자극됐던 그 낡은 호텔을 기억한다. 


온천장의 모델인 대만 지우펀 골목의 상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인생의 큰 변화 앞에서 마주하게 된 두려움을 주인공이 여러 가지 상징적 경험을 통해 극복해 내는 성장영화라고 볼 수 있다. 치히로에게 이사 가는 일은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일,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는 일은 어른들에게도 큰 스트레스다. 그래서 이사를 한 후에 병앓이를 크게 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거기서 부모님까지 사라졌다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치히로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치히로는 행방불명이 된 후 센이 되어 이 세 가지 시험에 도전한다. 첫 번째는 미지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 바로 오물신과의 맞대면이었다. 냄새가 코를 찌르는 오물신의 존재는 모두에게 끔찍했지만 유바바는 센을 시켜 그를 상대하라고 했다. 센은 약수를 공급해서 그를 씻어내려 했다. 그러다가 같이 욕탕에 빠지는데 거기서 오물신 옆구리에 박힌 큰 가시를 찾아낸다. 사람들과 함께 그 가시를 뽑아내자 오물신의 몸에서 몇 트럭분의 쓰레기가 뽑혀 나왔다. 그건 사람들이 강에 버린 각종 생활 쓰레기였다. 두렵고 더러운 모습의 오물신은 실제로는 깨끗한 강의 신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도전은 가오나시의 먹방과 함께 시작된다. 가오나시는 투명인간 같던 자신의 존재를 처음 알아봐 준 센에게 과도하게 집착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금으로 현혹한 후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치운다. 욕망은 끝이 없고 돈으로 사랑을 사려고 하는 현대인을 빗댄 이 장면에서 센은 돈의 유혹을 거절함으로써 두 번째 시험을 이겨낸다. 



세 번째 시험은 유바바의 언니 제니바를 향해 떠나는 목숨을 건 여정이다. ‘늪의 바닥’ 역이란 어쩌면 지옥의 은유인지도 모른다. 어둠의 깊은 골짜기로 향하는 센의 모습은 비장했다. 그 역에 다다르기 전에 모든 승객이 내렸다. 그러면 센은 왜 이곳으로 가야 했을까. 부모님과 하쿠를 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랑과 희생’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 주제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가끔 피곤에 지쳐 깊은 낮잠을 자다가 심한 악몽에 시달린다. 꿈이 깊을 때는 실제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꿈속에서 아무리 뺨을 때려도 일어나지 않는 ‘꿈속의 꿈’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면 꿈은 왜 꾸며 악몽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대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기인한다. 치히로는 어릴 적 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 물에 빠진 신발을 주우려다 일어난 사건인데 이후 치히로에게 물은 두려움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치히로는 외로움에 취약했다. 그 외로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는 극 중의 가오나시다. 뼛속까지 외로운 존재 가오나시는 존재감을 부각하려고 금을 만들어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유독 센만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다. 치히로의 마지막 두려움은 사라진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부모님의 뜻인 이사에 대해 마음속에서 분노를 느꼈고 그로 인해 부모님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라는 죄의식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센은 낯선 신들의 세계에서 엄청난 경험을 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미지의 두려움을 직면하여 이겨냄으로써 치히로의 영혼의 키는 한 뼘이나 자랐다. 그리고 세상은 정 붙이고 살아갈 만한 곳이라는 걸 치히로는 알게 된다. 신발을 가져다준 그을음 조각들이라든지, 가마 할아범과 린, 그리고 하쿠같은 존재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름, 즉 정체성을 끝까지 기억해 내는 일이었다. 하쿠 역시 유바바와의 계약서에서 바뀐 이름으로 인해 본명을 기억하지 못했다. 불공정 노예계약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그런 하쿠의 이름을 치히로가 되찾아 주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수수께끼 같던 두 사람의 인연이 밝혀지는 지점에서 두 사람이 끝없이 낙하할 때 치히로의 눈물이 하늘로 치솟는 장면은 압권이다. 한번 만난 인연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억해 내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우린 새삼 깨닫게 된다.




마지막에 하쿠는 치히로에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주제곡  ‘언제나 몇 번이라도’라는 제목처럼 치히로는 이후의 삶에서도 하쿠와 언제나 몇 번이라도 만났을 것이다. 하쿠 역시 자신의 고향인 강으로 돌아갔을 것이기에. 이처럼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때 안도감을 느낀다. 터널에서 하쿠의 조언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치히로는 더 이상 예전의 응석받이가 아니었다. 신들의 세계에서 모든 이들을 감동시키고 금의환향한 소녀영웅에 다름 아니었다. 비록 뚱뚱한 아빠와 새침한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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