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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Oct 01. 2023

<중경삼림>의 감정

관객들의 감정으로 완성되는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의 원제목은 Chungking Express. 중경은 홍콩 침사추이의 청킹맨션을 가리킨다. 이곳은 인도와 동남아인들이 많이 일하는 빌딩으로 첫 에피소드의 촬영지이다. 익스프레스는 두 번째 에피소드가 벌어지는 패스트푸드 가게 Midnight Express에서 유래되었다. 에피소드가 일어나는 두 장소가 영화 제목이 되었다. 



영화는 밝기가 서로 다른 두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본래 왕가위의 영화에서 시간은 중요한 키워드인데 <중경삼림>에서는 1994년 5월 1일을 적시하고 있다. 영화 속 경찰 223(금성무)의 나이가 정확히 25세가 되는 시점이다. 만우절에 이별을 통보받은 그는 한 달 안에 여자 친구가 다시 오길 기다리며 유통기한이 5월 1일로 찍힌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날까지 답이 없자 그는 쓸쓸히 스탠드바로 향한다. 거기서 처음 들어오는 여인과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그녀와 나는 0.01cm의 간격으로 스쳤고, 나는 57시간 후에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길거리에서 형사와 스쳤던 임청하는 밤새도록 도망자들을 찾아 동분서주하다 탈진하여 스탠드바로 향한다. 그녀에게 작업을 거는 금성무. “밤에도 선글라스를 쓰는 이유는 세 가지예요. 맹인이거나, 멋지게 보이려 하거나, 실연당한 경우죠. 혹시 실연당하셨나요? 저는 실연당하면 조깅을 하죠. 그럼 온몸에서 수분이 빠지기에 눈물이 나오지 않아요. 같이 조깅할래요?” 임청하는 조용히 거절한다. “나는 밤새도록 조깅했어요. 잠시 쉬어야겠어요.” 고단한 그녀는 금성무의 어깨에 기대어 긴 하루를 정리한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왕가위의 전매특허. 금성무는 이미 옷깃을 스쳤던 임청하에게 사랑의 예감을 느낀다. 카페에서는 주크박스를 통해 추억이 흐른다. 데니스 브라운의 ‘Things in life’는 삶이 던지는 우연성을 농담처럼 읊조린다. 방금 전 사람을 죽이고 온 여인은 경찰관의 보호 하에 호텔 702호실에서 깊은 잠에 든다. 다음날 아침 6시에 일어나 미친 듯이 조깅을 하고 돌아온 금성무의 호출기로 메시지가 와 있다. “생일 축하해요-702호실.” 이때 금성무는 유명한 대사를 중얼거린다.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LA의 햇빛처럼 뽀송뽀송하다. 형사 663(양조위)는 매일 패스트푸드점에 들러 샐러드를 주문한다. 주인이 피시 앤 칩스도 같이 권하자 그대로 따른다. 어차피 샐러드를 좋아하던 그의 스튜어디스 여자 친구는 떠났고, 야식의 종류보다 사람의 종류는 더 많을 테니까. 하지만 양조위를 몰래 바라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패스트푸드가게 사장의 사촌동생 왕페이다. 짧은 머리에 큰 눈을 가진 페이는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을 줄곧 틀어놓는다. 양조위는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시끄러운 음악을 좋아하냐고 묻는다. 남자는 건조하고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낮은 사람이다. 



왕페이는 양조위의 전 애인이 두고 간 편지 속 열쇠를 이용해서 그의 집을 방문한다. 엉망으로 어지러운 그의 집을 고무장갑을 끼고 청소하는 그녀는 서서히 그 공간을 자신의 흔적으로 바꿔나간다. 남의 삶을 몰래 엿보고, 전 애인의 흔적을 없애고 탄산수를 만들어 냉장하는 일은 그녀의 즐거운 일상이 된다. 양조위의 방은 그렇게 달라진다. 비누가 바뀌고 흰곰인형이 가필드로 변하고 CD플레이어에는 새로운 노래가 탑재된다. 하지만 무심한 양조위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 



왕가위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밝지 않다. 그는 홍콩반환이라는 현실에 절망하고 파편화되어 가는 인간관계에 대한 지독한 냉소를 가진 작가다. 서양과 동양의 감성을 고루 갖춘 그는 어쩌면 동서양 중간에 서 있는 이방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꿰뚫기란 어려웠고 난해한 해석이 넘쳐났다. 그런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갑자기 밝고 유머러스한 에피소드가 펼쳐지자 관객들은 환호했다. 


사실 <중경삼림>은 왕가위 감독의 대작 <동사서독>을 만들던 중 재정위기를 맞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두 달 만에 만든 작품이다. 장대하고 무거운 스케일과 사막이라는 로케이션에서 힘겹게 예술적 장면에 심취했던 그에겐 휴식과 노래와 패스트푸드가 필요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순간순간 떠오르는 상상을 모아 음악과 함께 이어 붙였는데 오히려 힘을 빼고 만든 작품에 엄청난 찬사와 호응이 쏟아졌다. 모든 운동도 힘을 빼야만 제대로 동작이 나온다고 하지 않던가. 반대로 감정과 스타일로만 점철된 졸작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서사가 탄탄해야만 명작일까.



에바 일루즈가 지적한 대로 감정은 개인의 심리적 범위를 넘어선 문화의 단위이자 사회적 관계이다. 오히려 감정은 극도로 압축된 표현방식이기에 강렬함이 더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이야기로만 풀어내야 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독단일지도 모른다. 또한 감정은 우리의 행동에 특별한 ‘기분’과 ‘색조’를 부여한다. 영화에서 감정이 표현된 장소는 비록 패스트푸드점이지만 우린 수많은 상상을 통해 추억을 떠올리고 관계를 복기한다. 그렇게 관객들은 저마다의 <중경삼림>을 만들어 낸다. 나아가 영화는 감정에서 비롯된 에너지를 행동하도록 견인한다. 조깅으로 실연의 아픔을 잊는 사람들, 사물에게 말을 거는 이들, 남의 집을 몰래 청소하는 사람들처럼 뼛속 깊은 곳까지 외로운 이들을 연민하게 만들어 소외되고 접속이 끊겨 공동체의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는 이들을 기어이 찾아내게 만든다. 탐욕과 배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순진하게 하이힐을 벗겨주고, 남의 어항에 금붕어를 사다 넣어주는 따뜻한 인간들의 온기를 받아 인간을 환대하는 새로운 자리로 나아가게 만든다. 



<중경삼림>에서는 중요한 순간에 대사 대신 음악이 답을 대신한다. 특히 California dreaming은 이 영화를 각인시키는데 더없이 완벽하게 사용되었다. 미국의 히피그룹 마마스 앤 파파스가 부른 이 노래의 가사는 사실 대단한 문장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캘리포니아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다. 얼마 남지 않은 홍콩의 운명으로부터 탈출할 곳을 꿈꾸기에 캘리포니아만큼 안성맞춤인 곳이 있을까. 


“나뭇잎은 갈색이고 하늘은 회색이에요. 나는 겨울의 한낮을 걸었어요. 엘에이에 있었다면 좀 더 안전하고 따뜻했을까요. 한 겨울에 캘리포니아를 꿈꿔요. 교회에 들러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척했어요.”



전편의 에피소드가 어두움이라면 후편의 에피소드는 빛의 영역이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금성무는 임청하에게 빛이 되어줄 수 있을까. 임청하의 선글라스는 비장하고 왕페이의 선글라스는 귀엽다. 왕페이의 발랄함이 캘리포니아 오렌지색이라면 임청하의 레인코트는 빛바랜 홍콩의 회녹색이었다. 꿈속에서 햄버거를 팔던 여성은 스튜어디스가 되어 LA에서 돌아오는가 하면 단골이었던 경찰관은 햄버거가게 주인이 되었다. 비행기는 애인에 비유된다. 때론 결항되고 취소되지만 언젠가는 돌아온다. 그렇지만 좌석이 예약되어 있는가. 제복과 사복이 뒤바뀐 현장에서 양조위는 잊지 않고 좌석을 컨펌한다. “당신이 원하는 목적지라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렇게 엔딩에 흐르는 음악은 왕페이가 부른 몽중인(夢中人)이다. 페이가 품었던 사랑의 꿈은 어느덧 양조위의 꿈으로 전이되어 있었다. 


“꿈속의 사람이여, 낯선 당신은 어쩌다가 내 답답한 맘속에 들어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는 것인가.”


홍콩반환을 3년 남겨둔 왕가위 감독은 그렇게 컬러풀한 꿈을 꾸었다. 젊고 생기 있던 자신의 젊음과 사랑, 그 낭만의 꿈에서 깼을 때 길고 아득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중경삼림이라는 텍스트는 관객들의 주관적 경험이라는 콘텍스트와 결합될 때 의미가 분명해진다. 나는 그걸 세 번 경험했다. 감독은 이 영화를 보며 휴식과 힐링을 얻고 깊은 잠과 몽상의 세계로 직진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실연의 아픔도 지난한 복수도 몽유병 같은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0.01cm의 간격으로 스쳐가는 인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그 안에서 끊임없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벌어지는 곳, 그곳이 ‘삼림’이라는 삶의 현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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