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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Oct 01. 2023

<빌리 엘리엇>의 신산함

어린이날이 더 쓸쓸하다

어릴 적 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데리고 창경원에 간 적이 있다. 그날은 어린이날이었다. 늘 바빴던 아버지는 회사에 갔고, 어머니가 의지적으로 애들을 끌고 나섰다. 뭘 봤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석양이 비쳐올 때 고단한 버스 속에서 묘한 서글픔이 느껴졌던 게 생각난다. 


십여 년 전, 어린이날을 맞아 오전엔 아이와 극장에 갔고, 오후엔 수영장엘 갔다. 잠수시간이 길어진 아이는 이제 물공포증을 어느 정도 이겨낸 듯 보였다. 수영장에서 처음 보는 아이와 함께 신나게 노는 걸 보니 흐뭇했다.


그 친구는 붙임성이 좋은 예쁘게 생긴 열 살 배기였다.

“넌 어디 사니?” 

“이 근처 주택단지에 살아요”

“누구랑 같이 왔니?”

“저 혼자 왔어요”


그냥 거기까지만 물어볼 걸 그랬다.

“엄마는 어디 가시고?” 

“일하러 가셨어요.”


“아빠는?” 

“... 아빠는 안 계세요. 태어날 때부터 안 계셨어요.”


그 말을 하고 아이는 다시 깊은 잠수를 했다. 그리고 보니 어린이날에 아이를 데리고 놀러 가는 부모만 있는 게 아니다. 휴일에도 마트는 문을 열었고, 대중교통은 놀러 가는 가족들을 실어 날랐다. 그들의 자녀들은 어디선가 외롭게 놀아야 하고 지는 석양을 보며 묘한 서글픔을 감내해야 한다.


그날 저녁에 마트에서 사진을 찾는데 고객 한 명이 사진이 잘 안 나왔다며 주인을 꾸짖었다.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주인에게 고객은 책상을 힘껏 내려치고 돌아갔다. 공휴일 밤 열 시까지 일한 대가가 겨우 고함질인가.


집에 돌아와 TV로 <빌리 엘리엇>를 보았다. 광산노조파업을 선동하는 빌리의 아버지와 형. 하라는 권투는 안 하고 발레를 배우는 빌리.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이 집 분위기에서 빌리는 춤을 통해 새처럼 훨훨 나는 유체이탈, 세상을 초월하는 기쁨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의 재능을 발견한 교사 윌킨슨 부인의 어려운 설득으로 그의 아버지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시위대를 뚫고 탄광으로 향하는 버스. 그 안에는 파업 주동자인 빌리의 아버지가 타고 있다. 그걸 바라본 형이 뒤따라와 아버지를 붙잡는다. 미쳤어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빌리는 겨우 열한 살이다. 우린 희망이 없지만 그 아이에겐 기회를 줘야 하잖니?”

아버지는 형을 붙잡고 통곡한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눈물이 솟구친다. 젤 웃픈 장면은 오디션을 보기 위해 런던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빌리 부자의 대화.


“아빤 런던 가 보셨어요?” 

“아니.”

“왜 여태 안 갔어요?” 

“왜 내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영국의 수도잖아요?” 

“런던엔 탄광이 없잖아....”


아, 이 썰렁하면서도 서글픈 답변이라니.


결국 합격통지가 오고, 열한 살 아들을 왕립발레학교로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심경은 착잡하지만 그래도 아들의 미래에 촛불하나 꽂는다. 


“아빠, 가서 싫으면 돌아와도 되죠?” 

“농담하냐, 네 방 세 놨다.”


빌리가 떠나고 아버지와 형은 다시 헬멧을 쓰고 갱도로 향한다. 빌리가 떠나고 윌킨슨 부인은 빈 체육관에서 담배 한 대를 물고 생각에 잠긴다. 갱도의 숨 막힘과 텅 빈 체육관의 쓸쓸함, 이 두 장면을 삽입한 감독은 인생의 쓸쓸함을 제대로 알고 있다. 


그 어린이날은 맑고 시원했다. 수영장을 나오니 서서히 해가 저물었다. 혼자서 수영장에 온 아이는 막대사탕을 물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돌아오는 길에 비친 석양에서 또다시 서글픔이 밀려왔다. 누군가에게 어린이날은 평일보다 더 잔인한 날이기도 하다. 이 쓸쓸함을 우리는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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