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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여행자 Feb 14. 2024

모든 것은 다 안개 때문에 ep2

  날카롭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정신이 확 든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침대에서 몸을 번쩍 일으켜 세워 전화를 받는다.


  "Good morning Purser, Your pick up time is 03:30 sm."

 (안녕하세요 사무장님, 000편 픽업 시간이 오전 3시 30분이에요.)

  "Sorry?, Say that again?"

 (네? 픽업 시간이 언제라구요?)

  "03:30 am. We have 15 minutes left."

 (오전 3시 30분이요. 앞으로 15분 남았어요.)

  "Not pm, but am? There is 15 minutes left, right?"

 (오후 아니고 오전 맞나요? 15분 남았다구요?)

  "Yes."

 (네.)


  삐-------

 호텔 직원의 "Yes"라는 대답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휴대폰 시간을 확인해 보니 3시 30분까지 정말 15분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호텔 직원과 전화하는 사이 14분 밖에 남지 않았다.

 상황 파악하는 데 잠시 로딩이 걸렸다. 분명 오늘 새벽에는 출발하지 못한다고 예상했다. 이미 샤워를 마쳤고 잠자리에 들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14분 안에 모든 것을 준비해서 나가야 한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속으로 되뇌었다.



 '자 그럼 뭐부터 해야 되지? 일단 메이크업하고, 머리 묶고, 유니폼 입고, 캐리어 챙기고, 로비로 내려가는 시간까지 하면...'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시간을 계산해 보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준비 시간이었다.


 "하 정말!!! 어쩌라는 거야?!"


  평소 혼잣말을 잘 하지 않는 나인데 이날만큼은 방언 터지듯 혼잣말을 마구 해댔다. 험한 말이 절로 나온다. 왜 이렇게 촉박하게 픽업 시간을 알려준 건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탓할 새도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메이크업을 하기 시작했다. 파운데이션이 묻은 쿠션으로 얼굴을 퍽퍽 두드리며 화풀이를 해댄다. 시간이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아이 메이크업만 하고 마스크를 끼기로 결정했다. 다음으로 헤어를 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평소처럼 잘되지 않는다. 머리카락 한 올이 자꾸 튀어나온다. 머리빗으로 벅벅 빗고 스프레이를 뿌려 대충 마무리 짓는다.

 유니폼을 챙겨 입고 마지막으로 캐리어에 짐들을 쑤셔 넣는다. 가방에 들어갈 자리가 없는지 다낭에서 산 망고 젤리가 잘 들어가지 않는다.


 "아 정말, 괜히 샀어!!"


 망고 젤리를 버릴 수 없기에 봉투를 뜯어 낱개 포장된 젤리들을 이리저리 쑤셔 박아 넣었다.



  우당탕탕 정신없이 준비를 마치고 로비에 내려가 보니 이미 승무원들이 나와있었다. 다들 헐레벌떡 급하게 준비한 터라 평소보다 어피(Appearance 어피어런스 줄인 말로 헤어스타일과 옷매무새를 말함) 상태가 엉성했다.

먼저 나와있던 승무원과 눈이 마주쳤고 서로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니 이게 뭐예요. 말이 안 되잖아요 사무장님!"


 화풀이할 곳이 없으니 얼굴 보자마자 다들 한 소리씩 한다. 비행 내내 점잖으셨던 기장님도 이번에는 화가 나신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부기장님이 허둥지둥 로비로 내려오셨다.



  캐리어를 픽업 차에 싫고 공항으로 향한다. 승무원들을 태운 픽업 차 안은 정적만이 흐를 뿐이다. 다행인 건지 창밖을 보니 안개가 조금은 나아진 듯 보였다.

  공항에 도착하여 상황 파악을 위해 가장 먼저 지상 직원을 찾아 나섰다. 직원은 나트랑으로 회항한 비행기가 다낭으로 오고 있기는 하지만 도착시간이 생각보다 더 늦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럴 거면 왜 급하게 우리를 불렀나 싶지만 늦은 새벽시간 모두가 지쳤기에 직원의 말에 더 이상 토 달지 않았다.

  게이트 앞은 비행기를 기다리다 지친 승객들이 여기저기 누워 쪽잠을 청하고 있다. 승객들은 화가 날 법도 한데 안개가 심한 상황을 눈으로 직접 봐서 그런지 다행히 지연에 대한 컴플레인은 심하지 않았다. 다만 엄청난 지연, 거기에 수면 부족으로 승객과 승무원 모두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해가 뜰 무렵 자욱했던 안개는 서서히 사그라들었고, 덕분에 우리는 해가 완전히 뜬 아침에서야 이륙을 했다.


  “손님 여러분, 오랫동안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비행기는 이제 이륙하겠습니다.”



  비행을 하다 보면 이런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기게 된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해도 말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삶을 대하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비행으로 또 한 번 삶을 대하는 방식을 배운다.



PS. 집에 와서 캐리어를 열어보니 정말 웃음이 차더라구요. 세면 용품은 물기가 그득하고 쑤셔 넣어 놓은 옷들은 주름이 잔뜩 져있고요. 특히 캐리어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망고 젤리 덕분에 기가 찬 웃음이 나왔답니다.


 이 사건이 있고 며칠 뒤, 다낭 비행을 같이 갔던 부기장님과 우연히 국내선 비행을 하게 되었는데요, 부기장님이 제 얼굴 보자마자 반가워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무장님, 그때 저희 진짜 힘들었었잖아요."

 지나고 보면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되나 봅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는 않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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