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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여행자 May 29. 2024

내가 비행기 조종실에 들어가는 이유

숨 쉴 구멍

  한라산 높이에서 일하는 것과 같은 기내.

  식사 카트를 잡고 수십 번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다 보면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물 주세요', '라면 주세요'와 같이 승객들의 동시다발적인 주문으로 내 머릿속 단기 기억 장치 신경들이 쭈뼛쭈뼛 곤두선다.

  비행기에서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여기가 하늘 위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곤 한다. 주어진 비행시간 동안 그저 정해진 서비스 순서에 맞춰 하나씩 해치우기 바쁘다. 쫓기듯 서비스를 마치고 그제야 점프싯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본다. 밤 비행이라 창문 밖 하늘은 깜깜하다. 그저 달빛만 있을 뿐이다. 문득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 상공 38,000ft(약 11km)라고 생각이 들며 새삼 색다르게 다가온다. 어둠뿐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니 여기저기 떠다니던 먼지들이 바닥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다.



  객실이 잠잠해진 틈을 타 '항공기 입출항 신고서'에 기장님의 사인을 받기 위해 인터폰으로 조종실에 연락을 했다.

  "기장님, 사무장입니다. GD(항공기 입출항 신고서) 사인받으러 들어가겠습니다."

  조종실 문이 삐삐삐- 요란한 소리를 내었고 동시에 나는 손잡이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철옹성 같던 조종실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허리조차 제대로 펼 수 없는 조종실에 구부정하게 몸을 굽혀 들어가며 기장님께 인사를 한다. 그리곤 조종석 뒷자리에 엉덩이를 반쯤 걸쳐 어정쩡하게 앉는다.

  입항 서류가 있는 서류 파일 보드를 기장님께 내밀었고, 기장님은 서류를 넘겨가며 차례차례 사인을 해나갔다. 몇 초 안 되는 순간이었지만 잠시 숨통이 트인다.

  서류에 사인을 마친 기장님은 나에게 '수고하세요 사무장님'말과 함께 파일 보드를 건넨다.

  "기장님, 저 여기 잠시 앉아 있다가 가도 될까요?..."

  나도 모르게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다.

  "그러세요. 허허허"

  객실 상황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기장님은 눈치껏 상황을 파악하셨고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나는 기장님들의 운항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조종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밤 비행으로 창밖에는 어둠이 가득했고 덕분에 조종실 안에 있는 각종 계기판의 불빛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조종실 안은 웅-거리는 비행기 엔진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관제사의 목소리뿐이다.

  "기장님, 저는 칵핏 Cockpit(조종실)에 들어오면 이 적막함이 참 좋아요. 잠시 세상과 차단된 느낌이랄까..ㅎ"



  조종실의 적막함을 깨는 나의 말을 시작으로 기장님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사무장님, 우리 지금 어디 지나가고 있는 줄 아세요?"

  기장님이 손가락으로 조종석 옆 창문 밑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손끝을 따라가 보니 수십만 개의 불빛들이 환하게 켜져 있는 도시가 보인다.

  "음.. 이륙하고 2시간 정도 지났으니까 대만 아닐까요?"

  "오!!! 어떻게 아셨지?? 정확하신데요?"

  "기장님, 저도 비행 짬밥이 있어요ㅋ"

  기장님은 "조금 쉬었다 가세요" 말 대신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잠시라도 칵핏에서 쉴 수 있게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지금에 와서 든다.

  "기장님, 감사해요. 덕분에 기분 전환됐어요. 이제 나가볼게요."

  "사무장님, 힘드시면 또 연락 주세요."

  조종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나에게 기장님은 엄지 척과 함께 미소를 내보이신다.


  조종실에서 나온 나는 삐뚤어진 스카프를 고쳐 매 본다. 기분 탓일까?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객실 복도로 나아가 잔잔한 미소를 지어본다.

  그렇게 칵픽은 내가 '숨 쉴 공간'이 되었다.



  비행기라는 갇힌 공간에서 일하는 승무원은 비행 중 바깥바람을 쐬러 밖에 나갔다 올 수도, 맛집을 찾아 점심 식사를 할 수도, 달달한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사 먹을 수 있는 카페에 가며 기분 전환을 할 수도 없다.

업무에 쫓겨 여유라고는 느낄 수 없는 회사 생활.

  매일이 살얼음 같기만 하고 긴장의 긴장으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있다. 주어진 업무를 끝내면 다음, 다음을 외치며 대기 중인 일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누가 대신해 줄 수도, 그렇다고 회사를 때려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달리기를 하지 않았지만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때론 감당 안 되는 일들에 치여 무력해지기도 한다. 그러다 부풀어 오른 풍선이 한 방에 뻥하고 터지게 되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숨 쉴 구멍이 필요하다.

  직장인에게는 맛있는 점심 한 끼, 달달한 커피 한 잔, 점심시간 키득거리면서 볼 수 있는 유튜브 영상이 그런 존재 일 수도 있고, 학생들에게는 공부 중 먹는 탕후루가 숨 쉴 구멍이 될 수 있다. 나에게는 비행기에서 보는 찬란한 일몰, 해 질 녘 노을, 암흑 같은 밤하늘에 쏟아질 것만 같은 별을 바라보는 것, 거기에 고요한 조종실이 그런 존재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만 곪아 터지기 전에 해소할 구멍을 만들어 내 마음을 짓누르던 스트레스 덩어리의 무게를 덜어내 보자. 이로써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숨 쉴 구멍'으로 부디 슬기로운 직장 생활을 하길..!



PS. 비행 중에는 창문 밖을 구경하는 것이, 비행이 끝나고는 랜딩 비어(비행이 끝나고 현지에서 맥주 마시는 것으로 승무원들이 주로 쓰는 말입니다)가 저의 숨 쉴 구멍입니다.

여러분의 숨 쉴 구멍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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