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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여행자 Sep 26. 2023

우당탕탕 나의 첫 비행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첫 비행 스케줄은 국내선 비행이었다.

기대했던 국제선 레이오버(Lay-Over 현지에서 일정 기간 스테이 하는 것) 비행이 아니어서 다소 실망했지만 첫 비행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충분히 설레었다.


첫 비행 당일, 브리핑 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하여 미리 준비를 했다. 전날까지 수험생 모드로 비행 준비를 했지만 혹여 실수라도 할까 봐 시험 직전 마지막으로 문제집을 들춰보는 심정으로 브리핑실에 출근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시간이었는데 막상 그 시간이 다가오니 어디론가 도망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브리핑 20분 전, 선배 승무원들이 출근을 하였고 곧이어 사무장님이 오셨다.

"안녕하십니까, 신입 승무원 000입니다"라는 나의 다소 경직된 인사와 함께 브리핑이 시작됐다.

보통 브리핑은 사무장이 주도로 질의응답 식으로 이루어지는데, 비행 연차가 쌓인 승무원들에게는 질의응답보다는 그날 비행 때 강조사항들만 전달하는 편이다. 하지만 신입 승무원의 첫 비행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무장님은 이 승무원이 준비를 잘해왔는지, 비행을 믿고 맡길 수 있는지를 질의응답을 통해 전반적으로 확인을 한다.

만약 준비가 안된 모습을 보여준다면 비행 내내 예의주시를 당하며 고생할 수 있다. 그래서 브리핑 때 첫 이지미가 중요하다.


"OO 씨 오늘 타고 가는 비행기 기종 특이사항 말씀해 주세요."

"그럼 비상 장비 점검 요령 말해보세요."

"오늘 공지사항들은 뭐가 있었죠?"


폭포수처럼 질문들이 나를 향해 쏟아졌지만 다행히 전날 준비를 철저하게 해 갔기에 1:1 테스트 같았던 브리핑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숨 막혔던 브리핑을 마지고 드디어 비행기에 올라탔다.

승객이 내리고 난 후의 비행기 안은 난장판이었다. 다음 승객을 태우기 위해 기내 청소를 해주시는 반장님들, 비행에 필요한 아이템을 실어주는 케이터링 조업사분들, 정비사님들이 각자 위치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수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지만 막상 비행기에 타니 뭘 해야 할지 몰라 갤리 한편에 멀뚱멀뚱 서있었고 '신입 교육 때 내가 뭘 배운 걸까'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할 새도 없이 탑승 시간이 다가왔다. 혼이 나간 상태에서 탑승하는 승객들을 향해 환한 미소와 함께 환영인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난리통에서 준비를 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승객들에게 환한 미소로 인사를 하고 있는 사무장님과 선배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는 음료를 쏟지 않기 위해 양 발을 최대한 넓게 벌려 중심을 잡으려 애를 썼고 그 모습은 마치 묘기를 부리는 거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한참 서비스하는 도중에 들리는 착륙 시그널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나기에 충분했다.

"OO 씨는 갤리 들어가서 착륙 준비하세요." 친절한 듯 차갑게 느껴지는 선배의 말과 함께 내가 들고 있던 음료 트레이를 받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서비스를 마쳤다. 그 선배의 모습은 마치 슈퍼우먼 못지않았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제주 공항에 도착을 했고 승객들이 하나둘 내리면서 내 영혼 또한 함께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활약은 승객이 다 내린 비행기에서도 계속되었다.

승무원은 승객들이 내린 후에 화장실을 포함해서 항공기에 잔류하는 승객이 없는지 체크해야 한다. 선배가 화장실 문을 열며 어느 부분을 누르니 문이 고정이 되는 것을 보았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선배를 따라 반대편에 있는 화장실 문을 고정하려고 비슷해 보이는 버튼을 눌렀다.


우당탕탕탕!!!...


순간 무언가 내 시야를 가린다.

"어머!! OO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화장실 문을 고정시킨 다는 것을 잘못 건드려서 화장실 문짝 자체를 떼어내 버린 것이다. 잘해보려 한 행동인데 내 눈앞에 비행기 화장실 문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 어이가 없을 뿐이다.

참다못한 선배는 "교육 때 안 배웠어요?"를 시작으로 비행 내내 나에게 쌓였던 감정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나는 탈수기에 들어간 빨랫감처럼 탈탈 털렸다.


첫 비행이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퇴근 후 집에 와서 유니폼을 입은 채 침대에 턱 누웠다.

긴장감 속에 비행을 해서 그런지 침대에 누웠는데도 비행기를 탄 것 마냥 몸이 둥실둥실 떠 있는 기분이 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니 빙빙 돌아 그대로 눈을 감는다.


누구에게나 어설픈 처음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입사 4년 차 대리처럼 일을 해내면야 좋으련만 경력직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부딪히고 깨지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그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다. 모든 걸 처음부터 잘 해내려고 하는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할 뿐이다. 내려놓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는 걸 10년 가까이 비행을 하면서 몸소 배웠다.

단지 내 속도에 맞춰서 하나씩 해나가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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