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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여행자 Oct 12. 2023

크리스마스이브에 받은 기장님의 쪽지

친절은 또 다른 친절을 낳는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승무원에게는 크리스마스와 같이 이벤트가 있는 날이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날이다. 크리스마스 두 달 전에 신청한 연차는 반영되었을 리 없었고 매년 그랬던 것처럼 비행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일본을 다녀오는 퀵턴 비행(현지에서 레이오버 하지 않고 목적지를 찍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이라는 것이다. 해외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도 낭만적이지만 해가 가고 연차가 쌓일수록 연말만큼은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추운 날씨 때문에 몸은 천근만근인 데다가 크리스마스 이브날이라는 생각에 더더욱 출근길에 나서기가 싫었다. 유니폼을 챙겨 입고 그 위에 패딩과 목도리를 걸치고 꾸역꾸역 현관문을 나섰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는 연말 특유의 분위기로 설렘이 가득한 거 같다. 한 손에는 달달 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찬 공기를 가르며 공항버스에 올라탔다. 그나마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기사님을 보며 위안을 삼는다.

  브리핑실에 도착하니 승무원들이 분주하게 브리핑 준비를 하고 있다.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승무원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힘이 난다. '어차피 비행할 거 기분 좋게 다녀오자!'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브리핑 말미에는 "오늘 퀵턴 비행이니까 후다닥 다녀옵시다!"라는 말을 하며 함께 가는 승무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연말이라 그런지 공항에는 여느 때보다 여행자들로 넘쳐났다. 들떠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에 눌리지 않게 구두를 더욱 또각거리며 걸어 나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비행기 타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공항에 있는 스타벅스에 잠시 들렸다. 주문을 하고 매장 한쪽에 서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매장에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멍하니 바라본다.


  시간 맞춰 게이트 앞에 가보니 이미 많은 승객들이 탑승구 주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대중으로 봐도 만석인 듯하다. 탑승구 앞에 있는 지상 직원에게 승객 현황을 물어보니 예상 적중으로 만석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 뇌세포들을 속이기 위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보았다.

  곧이어 비행을 함께할 기장님과 부기장님이 게이트로 왔다. 서로 인사를 하며 비행기 타기 전 간단하게 합동 브리핑(비행 전 기장과 승무원이 함께 하는 브리핑)을 했다. 기분 탓일까? 합동 브리핑을 주도해서 하는 기장님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기장님도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나와 같은 마음인 걸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겨우 들릴까 말까 하는 기장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게 아닌듯싶었다. 기장님의 상태가 신경 쓰였지만 그는 별다른 말없이 칵핏(Cockpit 조종실)으로 들어갔고 나는 바쁜 기내 준비로 기장님의 상태를 금세 잊어버렸다.

  정신없이 승객 탑승 준비를 마치고 기장님에게 기내 준비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 조종실로 들어갔다. 기장님에게 최종적으로 승객 탑승을 시작해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하던 찰나에 힘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네신다.


  "사무장님, 제가 오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 혹시 기내 상비약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알고 보니 출근 전부터 몸살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내내 기운이 없으셨던 것이다. 사무장 직책을 맡고 있는 승무원은 기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내 상비약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우리는 이를 '메디컬 백'이라고 부른다. 작은 파우치 안에 감기약, 멀미약, 지사제, 알레르기 약, 연고, 밴드 등 기내에서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비상약품이 들어있다. 메디컬 백은 승객들을 위해 사용하지만 객실 승무원과 기장에게도 필요시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기장의 건강 상태는 안전 비행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승무원이 기장 건강까지 챙겨야 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업무 교범 매뉴얼에 객실 사무장은 운항 승무원에게 탈수 방지를 위한 충분한 음료 제공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는 임무가 명시되어 있다. 그렇기에 사무장인 나로서 이 상황을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상태가 얼마나 안 좋으면 약을 찾으실까'라는 생각으로 메디컬 백에 있는 약을 기장님에게 넉넉하게 챙겨드렸다.


  "기장님, 여기 약 드릴게요. 어쩐지 합동 브리핑할 때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더라구요. 따뜻한 물도 같이 드릴까요?"


  기장님은 괜찮다며 약 몇 알만 받아 가셨다.

  승객 탑승을 위해 조종실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조종실에 앉아있는 기장님의 뒷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짠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비행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하지 않을 터인데 거기에 몸까지 아프니 말이다. 이런 우리의 상황을 당연히 알 리가 없는 승객들은 밝은 표정의 얼굴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승객 탑승이 완료되고 띵띵띵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는 하늘을 향해 이륙을 한다. 기장님의 컨디션과는 전혀 상관없는 힘찬 이륙이었다.


  만석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비행기 안은 조용했다. 물을 찾는 승객도, 기내 면세품을 사겠다고 하는 승객도 없었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짧은 비행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점프싯(Jump Seat 승무원 전용 좌석)에 앉아서 창문 밖 구름을 멍하고 바라보니 문득 기장님이 생각났다.

  '칵핏 안에서 괜찮으시려나?' 하는 생각과 함께 비행 내내 마음이 쓰였다. 비행 중간에 잠시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온 기장님에게 컨디션을 물어보며 상태를 확인해 보기도 했다.

  길게만 느껴졌던 짧은 비행시간이 지나고 다시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승무원들은 별 탈 없고 조용했던 비행이 만족스러웠는지 출근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퇴근 준비를 한다. 곧이어 기장님도 비좁은 조종실에서 나오셨다. 얼굴을 보니 출발 전보다 상태가 좋아 보였다.


  "기장님, 오늘 몸도 안 좋은데 고생하셨어요.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사무장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사실 출근 전에 병가를 써야 하나 싶었거든요. 감사합니다."


  그는 훈훈한 감사 인사를 하며 쭈뼛쭈뼛 나를 향해 무언가를 내민다. 이게 뭔가 싶어서 펼쳐 보니 기장님이 손글씨로 쓴 편지였다.



기장입니다.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많이 걱정되었는데

사무장님께서 잘 도와주셔서 덕분에

잘 다녀온 것 같습니다.

약 챙겨주신 것도 너무 감사합니다.

늘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 참

보기 좋습니다. 파이팅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다음엔

건강할 때 뵙겠습니다.


  쪽지를 펼쳐 그 자리에서 읽어보았고 기장님은 부끄러운지 멋쩍게 웃으신다.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했을 뿐인데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돌아왔을 때 그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차다. 아픈 와중에 조종실에서 고마운 감정을 눌러 담아 편지로 표현해 주신 기장님. 꾸밈없이 담백하게 써 내려간 편지 내용이 오히려 내 마음을 울린다.


  "기장님!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비행하는 게 정말 우울했거든요? 기장님의 편지가 크리스마스 선물 같아요. 기장님 덕분에 오늘 기분 좋게 퇴근할 수 있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기장님!"


  이보다 더 따뜻한 크리스마스 이브가 있을까?

  친절을 베푼 행동이 또 다른 친절을 낳는다. 좋은 사람이 될수록 내 주변에도 좋은 사람들로 채워지는 걸 경험한다. 나부터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이번 일로 다시 한번 느낀다. 퇴근길 공항철도에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쪽지를 다시 펼쳐본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비행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PS. 기장님의 쪽지를 휴대폰 사진첩에 저장해서 지금까지 보관해 놓고 있어요. 언젠가 다시 그 기장님을 만난다면 이날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보여드리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 조금 안된 시간 동안 아직까지 그 기장님과 비행이 나오지 않았어요. 오늘은 어디에서 비행하고 계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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