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에 대한 열망, '처음 음악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어느 순간부터 한국 SF소설에 빠진 이후로 매번 같은 작가님의 책만 읽다가 '김보영'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어 SF소설이라는 정보만 알고 무작정 도전하게 된 책. 이 작품들은 2009년 즈음 세상에 나왔던 작가님의 초기작들이라고 한다. 그때의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이런 작품의 존재를 몰랐다. (아마 그땐 알았어도, 그래서 읽었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을 듯. 꽤나 철학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 지금 발견하게 되어서, 이런 작품들이 이전부터 꾸준히 존재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정말 기쁘고 감사했던 책.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기면증을 가진 누군가의 편지.
기면증 환자는 천명 중 한 명이다.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이 마치 죽은 것 같이 기절해 있는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 깨우려 하고 치료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고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잘 기절하라고 말해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땅 밑에>
地국. 사람들은 땅으로,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나락'이라는 이름을 가진 깊은 지하미로가 있다.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또 그 아래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내려가는 것을 경외하고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을 '하강자'라고 부른다.
주인공은 하강을 하며 이미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만 어차피 다시 올라갈 수 없다면 끝까지 내려가보자는 마음을 먹고 더 아래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만난 미지의 빛나는 구체.
<촉각의 경험>
클론도 꿈을 꿀까? 기억이 없고 정보라는 것이 없는 클론. 시험관 속에서 수정되고 감각기관이 발달하기도 전에 외부와 차단된 배양기에 들어가는, 순수한 선천적인 정보만 있는 사람도 꿈을 꿀 수 있을 것인가.
클론의 꿈에 대한 의문을 가진 유시헌은 뇌파공명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클론을 상대로 실험을 진행한다.
'태어나 처음 음악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다섯 번째 감각>
연주의 언니 세연은 감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길에서 죽어가는 고양이를 알아채고 데려오고, 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알아채서 구해주다가 죽어버렸다.
그 사건을 조사하고자 여러 기관에서 연주를 찾아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들을 물어본다. 입을 이상한 모양으로 움직이지 않았는지, 언니가 차에 치였을 때 손을 올리고 입을 벌리는 행동은 왜 한 것인지.
그들의 말을 따르자면 세연은 자신들을 초능력자라고 하는 사이비 종교를 믿는 추종자이다. 그들은 입을 이상한 모양으로 움직이며 능력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연주도 그 일원으로 의심받고 있다.
<우수한 유전자>
유전자판별기를 통해 태어난 사람들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사회가 돌아간다. 그들은 재화의 한정성을 고려해 자신들의 수를 유지하기 위해 스카이 돔을 만들었다. 그 결과 일반인들은 정보와 기술에서 고립되어 퇴화하게 되었다.
<마지막 늑대>
용이 존재하는 세상. 어느 날 평범한 용의 애완동물로 지내고 있던 한 알비노가 용을 죽일 수 있다는 늑대를 찾아 가출한다.
그들은 이 풍경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들은 이 노래를 듣지 못한다.
'그는 밤이 오면 달빛이 은은하게 거리를 비춘다는 것을 모른다.'
<스크립터>
한 명이라도 게임을 계속하는 사람이 남아있다면 서비스 중지는 불가하다. 해당 조항에 따라 이 게임을 종료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접속자를 로그아웃시켜야 한다. 그 마지막 유저를 설득하기 위해 게임 속으로 들어온 직원.
그런데 그 유저 이외의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존재하는 것 같다. 당신은 사람입니까?
<거울애>
태호는 감정 호르몬 수용체에 문제가 있어서 감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정신과 의사인 연정은 그런 태호에게 소희라는 어린아이를 맡기고 죽는다.
소희는 어떤 병을 가지고 있는 아이인가. 어떤 여자를 만났더니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그 뒤에 들어온 남자에게는 칼을 꽂는다. 태호를 잘 따르다가도 목을 조르기도 하고, 스스로 자해를 하기도 한다.
<노인과 소년>
늙은 사제에게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질문하는 소년.
꿈에는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방식으로 살아왔지만 다른 지점에 서있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몽중몽>
열개의 꿈. 꿈을 꾸는 자의 이름은 여몽如夢, 그의 꿈에 매번 등장하는 자의 이름은 명일이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사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첫 작품부터 짧지만 충격적이었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하길.
1)
기면증은 실제로 있는 병이기에 별생각 없이 읽고 있었다. 그런데 작품의 배경은 지구가 아니었다. 밤이 없는 세계였다. 잠이 없는 세계였다. 그들이 말하는 기면증, 기절은 지구의 '잠'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환각은 우리의 '꿈'이다.
이렇게 엄청난 임팩트로 다가온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다음 작품들도 기대하며 흥분에 차 읽기 시작했다.
2)
<땅 밑에>는 위로 올라가는 것에 대한 갈망이 아닌 아래로 내려가는 것에 대한 갈망이라는 주제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제껏 내가 읽었던 SF소설 속 지하도시라고 함은 망가진 세계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갇힌 도시이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 반대로 묘사되었다. 심지어 그 땅 아래는 땅이 아니었다. 우주였다. 거기서부터 내가 느낀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직 나의 상상력으로 여기까지 받아들이기는 조금 어려웠다.
3)
그리고 가장 익숙하게 접해온 SF소설의 느낌이었던 <촉각의 경험>. 유시헌은 클론이 죽고 나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클론이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진 어떤 존재일까. 클론은 사람일까, 클론일까. 감각을 경험하지 못했던 클론이 유시헌을 통해 감각에 대해 알게 되며 갖게 된 감각에 대한 열망. 이 '감각'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작품에서 이어진다.
4)
표제작인 <다섯 번째 감각>은 가장 재미있었고 또 볼륨이 큰 작품이었다.
작품에서 '소리'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가 여럿 있었다. 우선 가장 대표적으로는 대화하는 부분이 전부 「 」 표시가 되어있었는데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추리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 아직도 관찰력이 이 정도라니..) 그 외에도 조사받을 때 '소리'에 대한 질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보통 '비명소리를 들었다'거나, '차의 경적소리',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는지'와 같은 말이 있을 법도 한데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도시가 물에 잠겨버린 전쟁 이후 인간의 유전자에 변형이 와서 청각을 잃었다고 한다. 그 후 교육과 사회적인 압력 때문에 듣는 것에 대한 모든 정보와 기록을 묻어둔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세연이 유난히 감이 좋았던 이유는 사실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시점부터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음악이 없는 세상. 음악이 마약인 세상. 소리를 듣는지, 듣지 못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세상.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돌연변이인 세상.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음악은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음악은 국가가 허용하지 않는 진짜 마약으로 분류된다. 아니, 그 자체가 금기시되어 사라진 역사 속에서만 존재한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항상 감각적인 자극을, 경험을 원한다. 그러나 그 감각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면 원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두려워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연주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작가님은 이 작품을 쓰며 듣는 것과 관련된 일상용어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셨다. '알아듣다.', '헛소리 한다.', '심장이 쿵 내려앉다.' 등.
나도 세연이 처럼 감이 좋은 사람이다. 청각이 예민한 사람. 그래서 한번 들었던 가수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노래 속에서도 잘 찾아내고, 작은 소리들도 잘 듣고 잘 놀라는 편이다. 그런 내게 듣는 것은 다른 감각들보다 중요한 감각이어서 이 작품이 유난히 좋았다.
5)
<우수한 유전자>는 최근 읽었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생각나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때와 비슷하게 '인간성을 고려하지 않고 경제성과 효율성만 추구한다면 사회가 이렇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6)
<마지막 늑대>는 다른 의미로 소름 돋는 작품이었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던 시절이 지나, 인간이 애완동물화 된 세상. 작가님은 '늑대와 개의 차이는 단지 인간과의 관계성으로 나뉘는 것이며, 개의 폭발적인 진화는 돌연변이를 선호하는 인간의 관여로 일어났다.'는 말에서 이 작품을 상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이 마냥 소름 끼치기보다는 다른 의미로 더 깊게 다가올 것 같다.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나조차도 분노하고 슬퍼하며 읽었으므로.
7)
<스크립터>는 게임을 좋아하는, 아니 게임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작품이다. 그런데 후반으로 갈수록 철학적인 질문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 인물은 캐릭터인가, 사람인가. 그것을 우리는 어떤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 정말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결말로 다가갈수록 생각이 명료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어질어질해졌다. 그래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겠지만 그 어지러움이 마냥 불쾌하진 않았다. 내게 많은 물음표를 남긴 작품.
8)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다섯 번째 감각>와 함께 <거울애>가 가장 취향이었다.
<거울애>에서는 '공생증'이라는 정신과적 질병을 가진 소희라는 아이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태호가 소희에게서 감정의 공백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감정에 대해 깨닫는 부분이 참 좋았다.
그리고 연정이가 한 이야기들 중에 '감정을 읽는 것'에 대한 표현이 크게 와닿았다. 읽을 수 없는 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고, 잘못 읽는 것은 상대의 눈에 비친 자신을 읽기 때문이라는 말.
내가 아무리 가까운, 아무리 잘 아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진정으로 읽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언젠가는 내게서 떨어져 나온 불순물 하나 없이 온전히 상대방의 감정만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남겨 준 작품. 아직까지도 여운이 남아있다.
9) 10)
<노인과 소년>은 종교적인 색채와 철학적인 물음이 많이 등장한다. 읽다 도중에 포기한 <데미안>이 떠올라서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 내용이 많이 어렵지는 않다. (<스크립터>가 더 어려웠지..)
그런데 <몽중몽>은 신화적이고 더 어려웠다. 이야기를 읽은 느낌이 아니라 꿈에 대한 전시를 한 편 본 느낌이었다. 전시 보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전시를 보러 가서 느끼는 그 기분, 뭔지 알 것 같은데 모르겠는 그 기분을 느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좋았던 부분은, 삶의 의미를 논하는 부분이었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사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의미가 있어야 살 수 있다면 살아남은 자는 없을 것이라는 것.
지금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SF책들을 재미있게 읽어본 경험이 있다면, 김보영 작가님의 책도 꼭 한 번 도전해 보시기를. 참고로 이 책이 작가님의 초창기 작품들을 엮어 낸 책이어서 최근의 작품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책만 놓고 봤을 때는 철학적인 질문들이 다른 책에 비해 많았다. 그런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을 좋아한다면 마음에 들 것이다.
'태어나 처음 음악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_ 촉각의 경험
아무것도 정보가 되지 못하는 가상세계 속에서, 당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_ 스크립터
지금까지 정상인이었던 사람들이 장애인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죠? 당신들이 그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을까요? <다섯 번째 감각>
평등이란 서로 같아지는 것에서가 아니라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온다고 하셨지요.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획일이 아니라 조화고, 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키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라고. 그런데도 역사는 언제나 어느 한 부분을 배제하고 축소하고 '더 낫거나' '더 옳다'고 믿는 것을 과다하게 확장하는 데에만 주력해 왔다고요. <우수한 유전자>
그는 자신의 집이 내가 그린 그림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의 집 벽 가득히 붉은 노을과 짙푸른 밤하늘을 그려놓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마지막 늑대>
"맞히는 것이 아니야. 네가 맞혔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네가 질문하면 그는 침묵하겠지. 말없이 너를 바라보기만 하겠지. 너는 그 침묵에 의미를 부여할 거고 네가 원하는 답을 그 침묵 속에서 듣겠지. 답은 네 머릿속에 있었던 것인데, 너는 그 답을 그에게서 보았다고 생각할 거야." <스크립터>
"읽을 수 없는 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야. 잘못 읽는 것은 상대를 읽는 대신 상대의 눈에 비친 자기 자신을 읽기 때문이야." <거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