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나선형

by 자연

나는 도파민 중독자다. 현대적 정의를 살펴보자면 멍하니 침대에 누워서 쇼츠나 릴스를 넘기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새로운 것에 목마른 사람이라는 뜻도 분명히 존재한다. 전자에도 후자에도 해당하는 나는 최소한 일년에 한번 이상 여행을 간다. 최근 코로나가 잠잠해지면서 공항에 가는 빈도가 부쩍 늘었는데, 그럴 때마다 여행길에 오르는 가족들을 꼭 한번씩 마주치곤 한다. 장거리 비행에 칭얼거릴 아기가 있나 매의 눈으로 살펴보는 나에게 그들은 더 눈에 띄기 쉽다. 혹여 비행기 이착륙 시 쩌렁한 소리가 울리면 나는 ‘어차피 커서 기억도 못할 텐데 여행을 데리고 다니는 건 부모 욕심이지 않나’고 심드렁하게 생각한다. 그런 심드렁한 나에게도 여행지에 오면 꼭 하는 생각이 있다. 아, 여긴 엄마랑 와도 좋아하겠다, 이 식당 같이 가면 욕 먹겠다, 여긴 데려오면 아빠가 돈 아까워 하겠다…. 빠지지 않는 부모님 생각이다. 최수종 하희라 가족처럼 맨날천날 뽀뽀가 넘쳐나는 각별한 사이도 아니고 그저 그런 가족이다. 굳이 각별함을 찾자면 늦둥이에 외동이라는 것 정도. 그럼에도 부모님 생각이 자연스레 나는 건 나이가 먹을 수록 어쩔 수 없나보다, 생각한다.


아니, 나이를 먹어서가 아닌가? 사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바꿔먹는다. 자주 가는 박물관인데도 왜인지 갈 때마다 신났던 도자기 박물관. 지금의 내가 예쁜 접시에 한 끼를 담아 먹는 걸 좋아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기껏 바다를 보러 간 제주도일텐데 떠오르는 건 셋이서 모여잤던 금호리조트 바닥. 매트리스 없이도 잘 자는 나를 만들었다. 아빠랑 등산하면 꼭 먹었던 산딸기, 산딸기가 물들었던 아빠의 하얀 모자, 발로 까줬던 밤송이. 호주의 한 마트에서 라즈베리를 보고 어, 산딸기가 영어로 라즈베리구나, 하고 25년만에 깨닫게 되었다. 비싼 돈을 주고 산 라즈베리는 어릴 때 아빠가 쥐어주셨던 산딸기보다 맛이 없었다.


그렇구나. 내가 지금 말하지 못하는 기억들도 나를 만들었겠구나. 어디선가 기억은 쌓이고 덮이는 거라고 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스물 다섯의 나는 기억하지 못해도, 열살의 나는 아홉살의 나를 기억하고, 열한살의 나는 또 열살의 나를 기억하며 그렇게 쌓아 올려진 거라고 했다. 수학적 정의가 그려낸 정비례의 xy그래프 모양이나 기술로 쌓아올린 반듯한 계단식 모양이 아니라 인간이 쌓아올린 것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렇다면 상처였던 기억들도 품고 있는 것이 여전하니 조금 슬픈가 싶다가도, 어쩌면 나의 구성품에 그런 조악한 기억들이 있기에 현명해진 것이라고 생각을 바꿔 먹었다. 나쁘고 슬픈 기억들이 있는 웅덩이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물이 튀길 테니까. 그렇게 배웠으니까.






엄마, 아빠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 기억들이 쌓여서 산딸기를 좋아하는, 바닥에서도 잘 자는, 도자기 접시에 밥을 먹는 나를 만들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설레는 여행길에 오르는 가족들을 보며 저 아이는 어떤 기억을 품고 자라게 될까 잠깐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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